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가 27년간의 교구장직을 마감하고 11월 30일 은퇴한다.
광주대교구의 책임자이며 아버지로서 몸바쳐 온 윤 대주교를 3일 교구장 집무실에서 만났다.
『민족애를 키워나가야 합니다. 교회는 이 사회가 이기주의로 흐르지 않고, 공동선을 추구해나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인터뷰에서 윤대주교가 가장 강조한 것으로 그가 추구한 삶과 신앙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말이었다.
27년간의 재임 기간 동안 느낀 보람에 대해 윤 대주교는 무엇보다 풍부한 사제성소를 꼽았다. 73년 교구장 착좌시 29명이던 한국인 사제가 현재 180명으로 늘어났다. 또 신자수도 7만2000여명이던 것이 27만3000여명으로 4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는 선교와 사제 양성에 남다른 정성을 기울인 윤대주교의 결실이기도 하다.
물론 아쉬움도 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공의회 정신이 어느 정도 구현되고 있는지에 대해 윤 대주교는 반문했다.
『교회는 하나의 신비체입니다. 친교와 일치를 이루고, 세상 안에서 항상 쇄신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세상 구원을 위해 복음화에 주력해야 합니다. 또 성령께서 이끄시는 방향으로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은퇴를 앞둔 윤대주교는 『교구에도 새로운 사목적 변화가 필요하다" 며 "후임 최창무 대주교님이 교구를 잘 이끌어 갈 것』이라고 교구의 앞날을 밝게 전망했다.
반세기 사제로서, 대사제로서의 삶 동안 윤대주교는 현대사의 아픔을 함께 했다. 50년 3월 사제품을 받고 곧이어 6.25가 터졌다. 물론 이 시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 때이기도 하다. 4개월 간 명동성당 보좌신부로 지냈을 때, 신자들이 피난을 가면서 고해성사를 보러 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고해소 에서 보냈다고 한다.
『다급한 상황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신자들의 믿음을 엿볼 수 있었지요』이어 윤대주교는 2년간 부산 포로수용소 종군 신부로 사목하게 된다. 중환자들에게 임종 대세를 주면서 『죽음의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특별한 사목 체험을 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6.25와 함께 윤대주교에게는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아픔이 있다. 80년 5월 광주 비극의 현장을 지켜본 「역사의 증인」으로서 진리와 정의를 위해 노력해왔다.
『5.18은 광주시민 뿐 아니라 전 민족이 당한 시련이었습니다. 교회가 진정한 고통의 의미를 밝히고, 민중과 함께 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는 점에서 뜻깊은 일이었습니다』
당시 군부 세력을 용서하느냐는 질문에 윤 대주교는 『용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고 강조하면도, 아직 진상이 규명되지 않고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데 아쉬움을 내비췄다.
『용서를 한다고 정의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상은 밝혀 져야 하고, 그들이 회개하도록 함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윤대주교는 후배사제들과 신자들, 그리고 국민 모두에게 당부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사제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목자적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신자들을 위해 내놓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교회 구성원 모두가 성삼위의 친교와 일치에 바탕을 두고 모범을 보여 주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공동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나라 전체가 발전돼야 한다는 생각이 약할 때, 분열 속에서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은퇴 후 윤대주교는 여러 가지 일들을 계획하고 있다. 무엇보다 선임자로서 후임자에 대한 배려를 드러냈다.
『최창무 대주교님께서 무척 바쁘실텐데 보좌주교님이 나오실 때까지 견진 성사 집전 등으로 최대주교님을 도와드릴 생각입니다』
그 밖에도 워드 프로세스를 배워 지난 해 구입한 노트북을 한번 사용해보려 한다. 그리고 C.C.K에서 해본 적 있는 교황 문헌이나 공의회 문헌 번역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 중이다. 특히 이북 개천에 살고 있다는 누이동생 윤요안나(67)씨를 만나고 싶은 간절한 염원으로 이산가족찾기에 신청을 했다. 27년간 광주에서 지내면서도 광주의 상징인 무등산 정상에 한번 오르지 못했 다는 윤대주교. 교구청 한 사제는 공식 일정 외에 개인적 시간을 갖지 않았던 윤 대주교의 성품 때문이라고 귀뜸한다. 항상 집무실 창밖으로 바라만 보았던 무등산에 처음으로 발을 내디뎠던 지난 10월 26일. 그 순간의 감회를 말하는 윤 대주교에게서 소박함이 묻어났다. 『모세가 느보산에서 눈을 감았지요. 무등산 정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약속의 땅' 은 어딘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1924년 평남 진남포에서 태어나 덕원신학교에서 사제 성소의 길을 걷던 청년 윤공희. 50년 남으로 내려와 반세기에 이르도록 오로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살아오며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던 길을 걸어온 윤공희 대주교.
긴 세월의 여정을 돌아보며 「약속의 땅」을 찾는 윤 대주교의 말에서 굴곡 많은 우리네 역사와 그 역사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온 한 신앙인으로서의 깊은 감회를 엿볼 수 있었다.
은퇴 후에도 '빛고을' 광주의 정신적 아버지로서 활발히 활동하며 보다 큰 사랑으로 교구민들을 보다듬을 윤공희 대주교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 약력
△1924년 11월 8일 평안남도 진남포시 용정리 출생
△37년 덕원신학교 중등과 입학
△50년 3월 20일 사제수품, 명동보좌
△56년 로마유학
△60년 4월 그레고리안대학 신학박사,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총무
△63년 10월 7일 초대 수원교구장 임명, 10월 20일 주교서품
△67년 4월 서울대교구장 서리 겸임
△73년 10월 25일 광주대교구장 임명, 11월 30일 취임 착좌
△75년 3월∼81년 3월 주교회의 의장
△80년∼84년 5월 한국 천주교 선교 200주년 주교위원회 위원장
△85년 4월 서강대학교 명예문학박사
△74년∼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 이사장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