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감온도 영하 12~3도, 서울 지하역사(驛舍)엔 또 하나의 세상이 펼쳐진다.
벽에 붙어 제각각의 요와 이불로 얼굴을 가린 채 잠에 빠진 노숙자들…. 듬성듬성 둘러앉은 무리들 사이에선 술판이 벌어지고.
건네는 담배갑에서 한웅큼의 담배를 빼든 이가 “이런 조그만 행운도 쉽게 오지 않는다”며 한마디를 툭 내뱉는다.
동사자 방지를 위해 이들을 돌보는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등 종교단체들의 방문이 그나마 이들에겐 위안. 구세주 탄생을 알리는 「성탄」을 말하기엔 이들의 삶은 너무나도 멀리 있었다.
호주머니에서 막 꺼낸 땀기 서린 손으로 장난삼아 땅을 짚자 이내 쩍쩍 달라붙으며 기분 나쁜 느낌이 전해져 온다. 체감 온도 영하 12-3도, 몸을 추스르며 서울역 광장에서 지하역으로 내려서자 약간의 훈훈함이 안도감을 품게 만든다. 그러나 별로 유쾌하지 않은 냄새가 이내 미간을 찡그리게 만든다.
새벽 2시, 서울역의 지하는 인적 드문 지상의 적막함이나 백열구 보안등이 던져주는 차가움이 한꺼풀 벗겨져 새로운 문화(?)가 펼쳐지고 있었다. 역사 아래를 관통하는 70여 미터에 이르는 지하 통로는 자칫 남의 집에 잘못 들어선 듯한 당혹감과 불안감을 품게 하기에 충분하다. 양쪽 벽에 붙어 제각각의 요와 이불로 얼굴을 가린 채 잠에 빠져든 노숙자들, 그 중간중간 네댓명의 남자 무리 또는 여자가 한둘 낀 가운데 벌어지는 술판 예닐곱, 조그만 자취집을 옮겨온 듯한 짐들 사이에 잠을 청하고 있는 노숙자…….
평균 100여 명 안팎의 노숙자들이 꾸준히(?) 찾고 있는 서울역은 아직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실직 노숙자 집결지라는 위상을 접지 못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성탄의 기쁨이나 설레임은 이곳 어디에도 발을 붙이기 힘들 것으로 보였다. 단지 그날그날 하룻밤을 어떻게 얼어죽지 않고 보내야 할지 두려운 결단만이 바깥 세상의 화려함에 겹쳐 떠올라 지나치는 이로 하여금 애상에 젖게 할 뿐이다.
지난해부터 서울역 등지를 오가며 노숙을 하고 있다는 이병렬(36)씨, 노모를 모시고 있는 그는 기자가 내미는 담배갑에서 한웅큼의 담배를 빼들었다. IMF가 길어지면서 이런 조그만 행운도 쉽게 오지 않는다는게 그의 말이다. 이곳에서 노숙을 한 지 11개월이 넘고 있다는 그는 어머니를 모시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괴로운 표정을 쉬 떨치지 못했다.
유상일(46)씨, 한쪽 다리가 불편한 그는 지하역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요셉의원에서 타온 약 봉지 수십개를 뜯고 있었다. 왜 그러냐는 물음에 그의 얼굴에서는 냉소가 잠시 비치는 듯했다. 뜯어낸 약봉지에서 쏟아져 나온 수백 알의 약에서 소염제와 진통제만을 따로 골라낸 유씨는 주머니에 소중하게 챙겨 넣는다. 이 약이 밤새 그에게서 겨울 추위를 잠시나마 잊게 하고 삶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구원인 셈이다.
유씨와 같이 모아둔 약이나 술을 통해 겨울나기의 방책을 세운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노숙자 중 반수 가까이에 이른다. 실제 지하의 곳곳에서는 어렵지 않게 뒹굴어 다니는 소주병과 깨진 병의 잔해를 발견할 수 있다. 한술 더 떠 술병을 모아 술을 사는 이들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틈에서 사소한 다툼이나 소란은 일상이 되다시피하고 있다.
서울역을 관할하고 있는 역전파출소 부소장 ㅈ경사는 『한때 1000여 명이 넘던 노숙자 중 대부분은 따뜻한 곳을 찾아 떠나고 지금 남아 있는 노숙자들은 대부분 부랑인의 수준으로 떨어져 난폭함이 더하고 있다』고 밝히고 『즉심에 넘겨 구류를 살고 나오더라도 곧장 서울역을 다시 찾는 이들이 대부분』이라고 전한다.
노숙자들의 무리 한끝에선 어린아이의 까르르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누구도 주의를 그곳으로 돌리려 하지 않는다. 이미 그들 사이에선 아이의 그 웃음소리가 낯선 소리가 아닌 일상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밤 10시나 12시쯤 사회단체에서 벌이는 무료급식의 줄에 아이와 아이의 엄마를 먼저 끼워주는 조금의 배려가 있을 뿐이다.
대여섯살이나 지났을까, 아이만큼이나 작은 남자의 손에 이끌려 뜨거운 김이 나는 라면을 타든 아이의 얼굴에서 번지는 만족어린 웃음이 오히려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IMF이후 급증했던 실직자, 급기야 가족단위로 나앉기 시작했던 노숙자들. 본격적인 겨울에 돌입했음에도 아직 서울역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노숙 가족이 한두 가정 눈에 띈다는 게 봉사자들의 말. 사연이 있을 법한 아이의 엄마에겐 쉽게 말이 건네지지 않았다. 제 나이가 일곱 살이라고 밝힌 상희와 한동안을 같이 놀아주며 아빠는 없고 엄마와는 오후쯤 나와 밤 12시쯤 역 근처의 집(아마 여인숙인 듯)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크리스마스 땐 무얼 할거냐는 물음에 상희는 『엄마하고 여기 놀러 나와야지』하며 배시시 웃음 짓는다. 태어나 한번도 성탄절을 지내봤을 것 같지 않은 아이에게 성탄은 이미 한발짝 물러 나있는 듯해서 가슴이 쓰려왔다. 그를 지켜보는 엄마는 성탄절을 지내봤는지…….
행려인들을 도우며 가끔씩 서울역 등 노숙현장을 찾고 있는 우리집공동체(지도=김종기 신부) 박상협씨는 『노숙을 하고 있는 여성의 대부분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봐도 좋다』고 밝히고 『무작정 물품을 전해주는 식의 돕기는 지양하고 노숙자들의 재활을 도울 수 있는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대책마련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이같이 노숙자를 낀 갖가지 현상들이 생기면서 예비노숙자들이 서울역을 찾는 모습도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12월 12일 밤 11시, 말끔한 차림을 하고 봉사자를 주시하던 박형선(29) 형우(26) 형제는 상담봉사자가 다가가자 이내 말문을 열었다. 전날까지 서울역 근처의 사우나에서 잠자리를 해결했다는 형제는 돈이 떨어져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며 돈은 안줘도 좋으니 숙식만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없느냐고 하소연한다. 창원에서 올라왔다는 김봉우(44)씨는 상담자가 일자리 찾는 법을 소개해주자 서울역을 총총히 사라졌다. 오늘은 역사 안 의자에서 밤을 나겠다는 말을 남기고.
서울역에서 노숙자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던 서인환(알로이시오ㆍ중립동본당)씨는『지속적이고 장기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않고선 이들같이 새로운 노숙자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지속적인 관심을 촉구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면서 발생할 지도 모르는 동사자 방지를 위해 12월 7일부터 야간순찰활동을 벌이고 있는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등이 중심이 된 가톨릭사회봉사단은 요즘 서울역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가슴 아픈 장면과 만난다. 밤 10시부터 새벽 3시까지 따뜻한 차를 들고 서울역을 비롯해 을지로 전역을 돌며 차 나누기를 펼치고 있는 이들은 노숙자들도 몇 가지 부류로 나뉜다고 전한다. 서울역이 아닌 을지로 등지에서 노숙을 하고 있는 이들은 그나마 재활의 의지를 늦추지 않고 있는 최근에 발생한 노숙자가 많다고. 이들은 기존의 노숙자들과 섞이지 않기 위해 노숙자들이 많은 서울역 등을 피해 비교적 한산한 곳을 찾는다고 한다.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이현숙(헬레나)씨는 『이들이 노숙하는 인근의 상점이나 시설이 피해를 당하지 않는 것이 이들의 도덕성을 가늠케 해준다』며 『책상에 앉아 하는 행정이 아닌 직접 발로 뛰며 도움이 되는 길을 찾는 행정이 아쉽다』고 덧붙였다.
입던 옷 한가지에 의지해 잠을 청하는 노숙자들에게 준비해 간 담요를 덮어주며 이들의 밤을 지키는 박상협씨가 던진 『이들 중 하나라도 죽으면 나의 잘못, 우리의 잘못』이라는 말이 무거운 돌이 되어 가슴에 내려 앉는다.
그리고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희망으로, 기쁨으로 다시금 오시는 아기예수, 그분을 맞는 기쁜 성탄이 이들에겐 「너무 멀리 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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