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8일 서울 송파구 문정2동 속칭 화훼마을과 개미마을이라 불리는 비닐하우스촌에 기쁜 소식이 하나 날아들었다.
철거대상인 무허가 비닐하우스에 산다는 이유로 주민등록 전입신고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자녀들이 취학하지 못하는 등 국민으로서의 기초적인 혜택도 받을 수 없던 이들에게 주소지를 가진 주민임을 인정하는 법원의 판결이 최초로 나온 것.
이곳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한 판결이 아닌 최모씨 등 주민 2명이 소송을 낸 결과이긴 했지만 주민들은 앞으로 전 주민이 공동으로 전입신고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80년대 후반 전월세값의 폭등과 재개발에 따른 강제철거로 이곳 비닐하우스에 살게 된 이들에게는 검은 차광막을 둘러쓰고 엎디어 있는 가슴아픈 마을 풍경만큼이나 서러운 사연들이 많다. 주소 한 줄이 없는 이곳 주민들은 전기, 수도, 하수, 전화 시설을 들여올 수 없었다.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공동수도가 들어오고 농업용 전기 대신 가정용 전기를 쓸 수 있게 된 것은 지난 99년 화훼마을에 큰 불이 나 비닐하우스 3분의 2 정도가 사라지고 난 후에야 가능했다. 돈없고 집없는 설움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사회로부터 격리돼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소외감과 박탈감이었다.
열악한 주거환경 심각
비닐하우스를 비롯한 무허가정착지 뿐 아니라 오래된 빈민주거지, 재해지역, 지하셋방, 쪽방 등 기본적인 주거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은 곳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은 전국적으로 대략 10만명으로 추정된다.
주거권실현을 위한 국민연합(이하 주거연합), 천주교도시빈민회 등이 이러한 지역에 살고있는 주민 3000여가구를 대상으로 최근 조사한 「주거빈곤가구의 실태와 최저주거기준 달성방안」(대한주택공사, 2000년 12월) 조사결과는 21세기 이 땅의 가난한 이들이 어떠한 주거 환경에서 살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 보이고 있다.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대도시권의 주거빈곤층 밀집지역을 조사 대상으로 한 이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 절대주거빈곤층의 주거실태는 주택설비, 주거환경, 주거밀도, 주거불안정 등이 매우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저소득층의 약 69%가 정부에서 설정한 최저주거기준 이하에 거주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세입자가 대다수(60%)인 이들 가구의 평균가구원수는 3.41명이나 사용방수는 1.67개, 전용면적 평균은 9.42평으로 1인당 평균 공간이 2.7평인 과밀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밀로 인해 응답자의 31.7%는 5세 이상 자녀와 함께 침실을 사용하며 9세 이상 자녀와 침실을 사용하는 가구도 21.4%에 해당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조사대상가구의 40.3%가 단독 화장실을 갖추지 못하고 공동화장실을 사용하고 있으며 목욕시설이 없는 경우도 61.5%에 달하고 있다. 비닐하우스, 움막, 판잣집, 임시가건물 등 무허가 불량주택에서는 그 수치가 더욱 높아져 화장실 공동사용이 55.5%, 목욕시설이 없는 경우가 75.8%까지 이른다.
또 현재 불량거주지에 거주할 수밖에 없는 배경에 대해서는 「소득감소」 「이전 주택이 너무 비싸서」 「철거가 되어서」 「집주인이 나가라고 해서」 등으로 나타나 「저소득과 점유 불안정」 등이 주거문제의 원인인 것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5년 이상 현 주거지에 거주한 경우가 57.1%에 달해(비닐하우스의 경우 74%) 주거빈곤의 악순환의 고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으며 특히 편부모 가정, 여성세대주 가정, 노령가장 가구의 경우에서 심한 주거빈곤 현상을 보여 사회경제적 취약성이 주거빈곤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주거빈곤의 해소와 사회경제적 빈곤대책이 결코 별개의 사안일 수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주거분배 문제 고려
집없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오래 전부터 사회문제로 등장했지만 이를 해결하려는 정책적인 노력은 미흡했던 것이 현실이다.
지난해 통계에 따르면 전국의 주택보급률은 94%. 이 정도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더 이상 주택이 아니라 주택의 공정분배라는 비판이 전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양적인 면에서 주거수준 향상은 주택의 대량공급에 의해 달성되고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배분되는지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한편 최근 들어서는 주택임대차 시장이 서서히 전세에서 월세 위주의 서구식 형태로 재편되는 추세로 전환하면서 주택에 대한 「소유」 개념보다 「사용」 개념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자는 주장 또한 다시금 제기되고 있다.
국민으로서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인 주거권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현실이 고착된 원인에 대해 주거연합 중앙집행위원회 유영우(토마스) 위원장은 『자본주의 논리 아래서 정부의 시장경제원리에 의한 주택정책과 주택공급체계가 저소득층을 시장경쟁에서 도태시켰고 또 공공부문 강화 등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주택에 대한 사회복지적 접근을 등한시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 『정부의 이러한 주택 정책에 따라 대다수 국민들이 집을 투기의 대상이자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재벌 건설업체와의 이해관계를 비롯해 제도적 모순과 한계를 안고 있는 주택금융제도 또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주거기본법 입법 추진필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유엔이 정한 「세계 무주택자의 해」였던 지난 1987년 회칙 「사회적 관심」을 통해 『주택의 결핍은 극도로 심각한 문제일뿐더러 그 성격이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또는 단순하게 인간적이라 할 일련의 그 모든 과오들의 표지 내지 요약이라고 보아야 한다』(17항)고 주거 문제를 규정하고 있다.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는 같은 해 「교회와 주택문제:그대는 집 없는 형제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라는 제목의 문서를 발표하고 이에 대해 더욱 상세히 논하고 있다.
이 문서는 『주택 문제가 집이 없는 사람들뿐 아니라 집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 대한 도전이며 집 없는 사람들이 겪는 비극의 깊이와 폭을 깨닫고 이를 민감하게 의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사람과 가정을 생존 이하의 조건으로 내몰 수 있는 무주택의 현실에 대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그들의 권리를 알려주어야 하고 그들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한 합법적인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고 밝힌다.
또 『교회는 정부와의 대화를 통해 이를 위한 정치적, 경제적 조치를 거듭 요청하고 이를 후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위원장=이기우 신부)는 이러한 교회의 입장에 따라 지난 96년부터 시민사회단체들과 연대해 국제토론회, 공청회를 개최하고 주거기본법 시안 마련과 주거기본법 입법추진위원회를 결성하는 등의 활동을 앞장서 벌여왔다.
이들의 시각은 주거가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라는 사실이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통해 모든 국민이 먹고 입을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를 국가가 책임지듯이 주거 역시 다양한 지표를 포함하고 있는 최저주거기준을 설정해 이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98년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관계자들로 구성된 주거기본법 입법추진위원회는 김대중 대통령과 면담해 주거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했으나 구체적인 입법 활동은 보이지 않고 있으며 아직까지 우리에겐 주거권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한 상태다.
한국주민운동정보교육원 박재천 원장은 『빈민사목위원회, 주거연합, 한국도시연구소 등은 주거기본법과 최저주거기준 설정을 위해 계속적인 연구작업을 진행 중이며 건설교통부의 이와 관련한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는 상태』라며 『가난하고 약한 이들이 주거침해를 당하는 현실을 법과 제도로 방지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을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일이 무엇보다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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