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O, 틀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X표 팻말이 서 있는 곳으로 뛰어가세요. 하나 - 둘 - 셋』
아리송한 문제를 하나 던져두고는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을 O, X 두 가지 표시가 적혀있는 팻말 주위로 흩어지게 하는 사회자. 우왕좌왕하던 사람들은 이내 두 패로 갈려지고 가운데로는 긴 줄이 드리워진다.
TV 오락 프로그램에서 가끔 보는 이런 장면이 최근에는 우리 나라 전체에서 「자행」되고 있다.
이른바 「언론 개혁」을 전후해서 노골적으로 격화되기 시작한 이러한 OX 놀이는 이러한 분위기를 일부러 조장하고 여론몰이를 고의적으로 하든 아니면 실제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든 어쨋든 최근 정치, 사회적으로 우리 사회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사회적 현상이 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오래 전부터 「흑백 논리」라는 비판적 용어로 비지성적이고 맹목적인 행태로 지적되어온 반문화적이고 반문명적인 행동 양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전 소설가 이 모씨의 신문 기고문을 둘러싸고 작가와 네티즌들 사이에 한바탕 공방이 벌어지고 이것이 일파만파로 확대되어갔고 색깔론과 지역주의, 진보-보수의 잣대로 양 패로 갈라져 싸우고 있는 듯한 추태들이 이어졌다. 이러한 흑백의 갈등과 대립은 8월 21일 평양에서 열린 민족통일대축전 행사에 참가한 방북단을 맞는 김포공항의 표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한쪽에서는 방북단의 북한에서의 행동을 친북, 매국으로 비난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돌출적인 행동을 한 인사를 일러 진보적 지식인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칭송했다.
어느 「편」이 옳고 그른가는 둘째 치고 우리 사회가 양분되어 서로의 주장을 고수하려고 갖은 수단을 다 쓰고 있는 듯한 인상을 우리는 요즘 받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확실히 최근의 대결 구도는 문제가 있다. 나, 그리고 나와 의견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주장만이 옳고 그 외의 모두는 나의 적으로 여기는 극단적 흑백 논리에다 저질의 감정적 언어까지 스스럼 없이 구사함으로써 논쟁과 대립은 더 타락의 길을 걷고 있다.
일상에서 낯익은 흑백논리
하지만 이러한 최근의 흑백 논리의 현상은 사실 우리 일상 생활에서도 깊이 뿌리내려 있는 것을 자주 본다. 앞서 언급한대로 TV 방송에서의 편 가르기식 프로그램 구성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경향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요즘 붐을 이루는 TV 토론 프로그램들이 손꼽힌다. 여기에 인터넷에서 자주 실시되는 여론 조사나 하나의 이슈를 놓고 그에 대한 찬반 양론을 벌이는 모습에서도 우리는 자주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전의 TV 토론 프로그램들은 주로 권위 있고 전문성을 지닌 인사들을 패널로 등장시켜 한 가지 이슈에 대해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런데 최근에는 해당 주제에 대한 다양한 의견의 제시보다는 찬성과 반대의 논리적 근거를 대도록 한다.
이는 토론에 참석한 인사들이 논의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찬반 양론으로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두 패로 나눠져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혹자는 이러한 방식의 토론이 좀더 명쾌하고 다이나믹하게 결론을 유도할 수 있다고 선호할 수도 있겠으나 그 자체가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다.
정신건강 해칠 우려까지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흑백 논리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우리는 종종 볼 수 있다. 다양한 사물과 사건들을 이것 아니면 저것의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로 접근하는 경우를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심리적인 면에서 이처럼 사물을 단정적이고 전부, 아니면 전무(全無)의 판단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정신적인 건강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심리학자들의 진단이다.
최근 미국에서 이뤄진 한 연구에 따르면 흑백 논리로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불안한 감정 상태에 빠져 자신의 가치나 목표가 난관에 봉착해 좌절되면 심하게 화를 내는 등 정서적으로 불안한 상태로 빠지는 사례를 발견했다고 한다. 특히 이런 감정적인 장애가 장기화되면 오랫 동안 심리적인 건강 문제를 야기한다고 한다.
이러한 심리적 상태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의 효율성과 합리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뿐만 아니라 이런 감정의 장애는 문제를 해결하거나 원만한 대인 관계를 유지하는데에도 어려움을 겪게 한다.
흑백 논리는 논리학적으로 볼 때 논의의 대상에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가능성을 간과하고 무시하면서 양극의 두 가지 대상에만 국한시켜 결론을 내리는 오류이다. 흑이 아니면 백이고 선이 아니면 악이라는 방식의 양 극의 두 가지로만 구분함으로써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예컨대 철수는 우등생이면서 열등생일 수는 없지만 우등생이지도 열등생이지도 않을 수 있다.
흑백 사회가 지배하는 사회는 비인간적인 사회로 떨어지기 쉽다. 과거 농경사회나 목축사회 등 사회 전반이 유사하고 동일한 인적 구조와 생활 환경을 유지하던 시기가 아니라 온갖 계층에 온갖 사고 방식과 이념이 동시에 공존하는 오늘날 현대 사회 안에서 흑과 백으로 양분해 서술할 수 있는 것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애당초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는 사회 구성원이나 조직들간의 대립과 갈등을 전제로 한다. 갈등과 대립을 무조건 위기로 간주하거나 갈등의 존재 자체를 바람직하지 않을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시대 착오적이며 권위주의적이다.
다만 갈등과 대립을 배척하는 것보다는 이런 갈등과 대립 양상을 이분법적으로 재단하고 구분하려는 자세이다. 다양한 주체와 다양한 환경, 이념 속에서 당연하게도 갈등과 대립은 생겨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개혁과 이에 대한 반동, 진보와 수구, 좌와 우로 모든 것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악의적인 편가름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행태야말로 냉전의 유산이다. 민주정치, 민주시민의 자세는 이념과 신념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그대로 인정되는 것이어야 한다.
흑백 논리가 인종 문제로 옮겨질 때 혹독한 인종 차별이 야기된다. 피부색을 기준으로 백색 피부만이 우월한 존재라는 터무니없는 편견이 발생하고 다른 인종에 대한 차별을 자행한다. 민족 문제로 들어서면 자기 민족의 우월성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인종 청소'라는 인류사적인 비극이 발생할 것이며 종교라는 측면에 적용될 때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선교, 그리고 그에 따른 테러와 타종교에 대한 탄압이 발생한다. 오늘날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인간적 행태들이야말로 자기만이 옳다는 무모한 흑백 논리의 결과이다.
관용의 바탕은 사랑
흑백 논리의 비인간적 요소를 해소할 수 있는 교회의 가르침은 「관용」이라는 말에 집약된다. 남의 의견과 행위 방식을 인정하고 보장해주는 관용적인 태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이론적이 아니라 실천적인 것이다.
비관용의 대표적인 예로 역사에서 종종 비난받는 「종교전쟁」은 유럽에서 그리스도교가 얼마나 관용의 자세를 보여주지 못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야기되곤 한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시대에 맞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 자유를 실현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데 잠시 소홀히 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관용을 현대의 역사적 상황과 현대인의 의식에 주목하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관용의 의미와 자유에 대해 논한다. 공의회는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을 통해 다른 종교나 세계관에 대한 소극적 관용의 원칙과 결별했다. 관용은 자유와 인격성이라는 인간의 존재론적 비밀 속에서 찾아야 하는 개념이다.
19세기 교회가 주로 진리 문제를 둘러싼 논쟁을 벌였던 것에 비해서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다. 교황 비오 12세까지는 주로 진리의 옹호가 주 관심사로 강조됐으며 이는 그 자체로서는 옳지만 현대 다원 사회 안에서의 평화적 공존에는 미흡한 태도였다고 평가되곤 한다.
물론 여기서 가톨릭적 의미의 진리가 포기된 것은 아니며 다만 현대의 역사적 상황과 현대인의 의식이 각별히 주목된 것이다.
무엇보다 관용이라는 가르침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관용의 핵심은 바로 사랑이다. 따라서 관용은 다른 사람들을 억압해서도 안되고 위선적이거나 무관심한 태도의 경향을 띠어서도 안된다.
참된 의미의 관용은 개인이나 단체, 정부를 막론하고 우리 모든 사회 구성원, 구성체에 예외 없이 요구되는 것이다.
특히 수없이 다양한 요소들이 한데 뒤섞여 있는 현대 사회 안에서 다양성을 관용하는 자세가 없을 때 남는 것은 오로지 갈등과 대립 뿐이며 이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도 더 이상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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