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목사(晉州牧使) 정재원(丁載遠)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가 한국초대교회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의 아들들은 약현, 약전, 약종, 약용 4형제인데 그 중에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 1760~1801)은 셋째 아들이다.
정약종은 한국의 103위 순교성인 중에 성인 정하상(丁夏祥)과 정정혜(丁情惠)의 아버지이시다. 달레 신부는 그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정약종을 두고 「천주교가 이 나라에서 가졌던 가장 유명한 인물 중에 한 사람이며, 가장 위대한 순교자 중에 한사람」이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그의 후손인 우리는 아직도 그를 복자나 성인으로 모시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 위대한 순교자가 성인으로 선포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삼가 그의 유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천성이 곧고 총명하며 연구심이 강하여 일찍이 학문에 전념하여 문필에 성공했다.
그는 점잖고 학식 있는 인사들과 교제하여 이가환 등 당대의 저명한 선비들과 친교를 맺고 있었다. 그는 입신양명을 위한 과거시험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에 증진하여 철학, 윤리 등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한 동안 그는 추종자들에게 불사(不死)의 비법을 얻겠다고 약속하고는 노자의 도를 연구하기도 했고, 또 의학에 심취하여 큰 명성을 얻기도 했다.
마침내 천주교가 전래되자 그는 곧 그 교리를 공부했다. 그러나 천주교 교리를 즉시 따르지는 않았고, 오히려 이벽(李蘗)의 신앙생활을 염려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786년에 그의 망설임은 끝이 나고 영세입교할 때, 그가 망설였던 것이 성 아우구스띠노의 젊은 시절 지성의 방황과 닮았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수호성인으로 받들며 세례명을 아우구스띠노라 정했다.
신자가 된 정약종은 다시는 주저함도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어떤 찬사도 미칠 수 없는 열성과 항구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1791년 진산사건으로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에는 비참하게 배교한 형제와 친구들 속에서도 그는 뛰어난 모범으로 신앙생활의 귀감이 되었다.
정약종을 친하게 알았던 황사영은 그의 사람됨에 대해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그는 세속 사정은 조금도 돌보지 않고 특히 철학과 종교연구를 즐겨 하였다. 교리의 어떤 점이 분명치 않게 생각될 때는 그것을 연구하느라 침식을 잊고 그것을 밝혀 내기까지는 휴식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길을 가거나 집에 있거나 말을 타거나 배를 타거나 깊은 묵상을 그치지 않았다.
무식한 사람을 만나면 온갖 정성을 들여 그것을 가르쳤으며,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그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귀찮아하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아무리 우둔하더라도 그들에게 자기의 말을 이해시키는데 신기할 만큼 능숙했다.
그는 조선말로 「주교요지」라는 책 두 권을 저술하였는데, 거기에는 그가 천주교 서적에서 본 것을 모아놓은 다음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으며, 무엇보다도 명백히 그것들을 설명하는데 힘썼다. 이 책들은 이 나라의 새 교우들에게 귀중한 길잡이가 되었으며, 주문모 신부도 그것을 인정하였다.
정약종은 교우들을 만나면 인사를 나눈 후 곧 교리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교리 이외의 쓸데없는 말을 끼울 수가 없었다. 그가 통달하지 못했던 어려운 점을 누군가가 풀어주면 그는 마음에 기쁨이 넘쳐흘러 그 대화자에게 뜨겁게 감사했다. 반면 냉담자나 우둔한 사람이 구원의 진리를 기꺼이 듣지 않으면 그는 근심과 걱정을 억제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온갖 문제들을 질문하였는데, 그는 정확한 답변과 단순하고도 명백한 말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신앙을 굳게 하고 애덕을 더하게 했다』
그는 당대 가장 뛰어난 교리지식을 바탕으로 교리서인 「주교요지」 상·하를 저술하여 중국의 교리서인 「성세추요」를 능가하였고, 종합교리서인 「성서전교」를 집필하던 중 1801년 박해로 순교하였다. 그의 순교는 그의 일생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마재에서 서울로 말을 타고 가던 중에 정약종은 금부도사를 만났다.
그는 사람을 보내 누구를 잡으러 가는가를 알아보게 하였고, 금부도사가 자신을 체포하러 가는 길임을 알고 그 자리에서 곧장 감옥으로 갔다. 신문을 받는 동안 그는 엄숙히 신앙을 고백하며 천주교 진리를 설명하였고,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하느님을 배반하는 일에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형장으로 끌려갈 때 그의 얼굴은 아주 빛났다. 옥중과 법정에서 지치지 않고 전도한 그는 그의 순교장소를 매우 감동적인 강단으로 만들었다. 그를 죽이기 위한 형구들을 행복스럽게 바라보며 소리 높여 마지막 강론을 힘차게 했다. 그는 형구에 머리를 댈 때, 『하늘을 쳐다보며 죽는 것이 낫다』고 하며 하늘을 볼 수 있게 머리를 바로 누였다. 망나니가 벌벌 떨며 마지못해 첫 칼질을 하였다. 목이 절반밖에 잘리지 않았지만 정약종은 벌떡 일어나 십자성호를 그은 다음 다시 처음의 자세로 누워 순교하였다.
한국 최초의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초대회장, 초대교회의 가장 뛰어난 지도자 중의 한 분, 가장 위대한 순교자 중 한 분이신 그는 42세로 그 생을 마쳤다. 초대교회에서는 그의 무덤에서 수많은 치유기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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