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금가항 성당 관련 자료들에 따르면 대략 성당이 건립된 연도는 1626~1643년(중국 명대)경으로 확인되며 중국 동북 지역 복음화의 산실로 중국 천주교 발전에 한몫을 담당해온 것으로 알려진다.
처음 설립된 성당(A)은 김씨 집성촌인 「금가항」 서쪽에 건립된 것으로 확인됐으며 금가항 성당 설립연대는 바로 이 성당의 설립연대를 의미한다. 현재 이 자리는 고층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어 비슷한 연대에 건립된 금가항 동쪽 「큰청(大廳)」 건물들(B, Ⅰ)이 1644년 이후 성당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서쪽에 있던 성당이 이곳으로 이전된 이유에 대해 한국교회사연구소 서종태 박사는 『신자수의 증가로 아마 큰 성당이 필요했으며 관청으로 이용되던 건물이 비교적 규모가 커 이곳으로 성당이 이전된 것 같다』고 말했다.
당묘교 성당으로 이전되기 전 김대건 성인 기념관으로 사용된 건물 B는 한때 사제들의 숙소로 사용됐으며, 규모는 연건형 12평에 2층 기와 건물이다.
이번 실측에서 김정신 교수는 먼저 건물의 구조 분석을 통해 성당 전체를 떠받들고 있는 기둥간의 간격이 그림과 같이 차이성과 동일성을 함께 발견할 수 있었다.
서쪽에서 이전되어 맨 처음 성당으로 사용했던 건물(Ⅰ)의 기둥간격에서 가운데 부분이 가장 넓음을 확인했으며 이는 이 곳에 출입문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 첫 번째 증축(Ⅱ)과, 두 번째 증축(Ⅲ)이 이뤄졌으며 원래 건물과 증축된 건물들은 각각 구조와 재료의 차이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교수와 서종태 박사는 첫 증축은 1644년 이후에서 금가항 성당이 남경교구 주교좌 성당으로 지정되기 전인 1841년 전까지 이루어졌고, 이어 1845년 김대건 성인 사제수품후 두 번째 증축(Ⅲ)이 시행된 것으로 분석했다.
철거된 성당 북쪽에 파괴된 흔적이 있는 대성당(C)은 1872년 설립돼 확장되어 사용돼다 1938년 일본군에 의해 폭격을 당하였고, 1948년 새로운 건축 양식에 의해 주교관을 비롯한 성당 건물이 재건립되었으나 새로 건축된지 한달여만에 국·공 전쟁에서 패한 국민당에 의해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이후 1958년 문화혁명 당시 완전히 철거되어 흔적만 남게됐다. 이번 조사에서 마당 남쪽에서 발견된 우물은 내벽이 기와로 형성돼있어 이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는 우물들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구조며 상당한 역사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이 우물의 위치를 고려해봐도 「B, Ⅰ, 우물」로 구성된 집 형태에서 Ⅱ, Ⅲ이 잇달아 증축된 것으로 보인다.
김교수는 『건물을 구조적으로 관찰해볼 땐 건물이 파괴되었거나 철거되어 새롭게 건축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밝혔으며 서박사도 『지금까지 발견된 문헌에선 건물이 파괴된 사실이 기록된 곳은 없었다』고 말했다.
두 전문가는 이런 사실을 근거로 『철거된 금가항 성당 건물이 김대건 성인이 사제품을 받았던 바로 그 건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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