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비극이 그대로 드러나는 포로수용소가 나의 두번째 임지였다.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된 수용소에서 나는 약 1년동안 사목활동을 했다』
전쟁의 비극이 그대로 드러나는 포로수용소. 첫 임지에 가보지도 못한 채 제주도에서 피난민 구호활동으로 얼마간을 보낸 나의 다음 임지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였다. 「유엔군 포로수용소 보조 군목」이라는 직책으로,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된 수용소에서 나는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페티프렌 신부와 사목활동을 했다.
수용소에는 인민군 출신으로 원래부터 좌익사상을 갖고 있던 「북한 포로」와 자기 의사와는 관계 없이 인민군에 끌려간 우익 포로들이 분리수용돼 있었다. 북한 포로들은 공공연히 공산주의를 찬양했고 이른바 반공포로들을 색출해 테러를 가하기도 했다.
그래서 분위기는 흉흉했고 때로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루는 수용소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까마귀 온다 까마귀 온다』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무리의 포로들이 나를 향해 밀려왔다. 『신부님 조심하십시오』라는 외침과 함께 교우 포로들이 나를 둘러쌌다. 아찔한 순간이었지만 다행히 교우들의 보호로 간신히 그 곳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들이 좌익 포로들에 의해 무슨 변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고두고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수용소 당국이 북한 포로들을 우익과 좌익 포로로 분리 수용하게 됨에 따라 50여명의 교우포로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킬 수 있었다.
1년 남짓한 거제도 수용소 사목 활동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몇 명의 교우들을 선발해 후일을 맡겼다. 생명의 위협을 무릎쓰고 수용소 안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힘을 써준 그들은 참으로 신앙의 증거자들이었다.
나는 거제도에서 논산 연무대와 광주 상무대 수용소로 사목지를 옮겼다. 거제도 수용소 당국이 포로들을 분산키로 했기 때문이었다. 당국은 중공군 포로등 일부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광주, 논산, 부산 등지의 수용소로 보냈다. 이는 수용소 소장이 포로들에게 인질로 잡혔던 「제너럴 다드」 사건 때문이었다.
드디어 1952년 여름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유엔군과 정부가 전쟁 포로들을 석방하기로 한 것이다. 이와 함께 나의 군 사목도 막을 내렸다. 그리고 새 임지로 발령 받은 장호원 본당으로 향했다. 장호원 본당은 지금의 청주교구 감곡본당으로 당시에는 충북 음성군과 중원군 일대는 물론, 경기도 장호원 지역까지 넓은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다.
부임 당시 주임은 메리놀회의 파디 신부가 맡았고 인천교구장인 나굴리엘모 주교는 제2보좌신부였다. 나는 유일한 한국인 사제였기에 본당 사목의 대부분을 맡아야 했다.
본당 관할 지역이 워낙 넓어 나는 주임신부의 자동차를 얻어타고 시골길을 달리며 관할 공소의 사목활동을 했다. 그해 새로 부임해온 레이 신부가 영사기를 가져왔다. 나는 자동차에 발전기를 설치하고 영사기를 가지고 공소를 순회하면서 시청각 교육을 했다. 당시로서는 구경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이때부터 카메라에 대한 관심이 시작됐다. 나는 본당 행사는 물론 감곡성당과 인근 지역의 전경들을 담아 소장했고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항상 카메라부터 챙겼다. 지난 1995년 「감곡(장호원) 본당 백년사」 편찬 때 그동안 간직해온 슬라이드 필름과 사진들을 기증했다. 요즘은 6mm 캠코더를 항상 메고 다닌다.
장호원 본당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성체 거동 행사」이다. 당시부터 장호원 본당의 성체 거동 행사는 한국 교회 전체에서도 유명했다. 매년 6월 성체 성혈 대축일에 즈음해 열렸던 성체 거동은 장호원본당 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참여했고 서울교구장이었던 노기남 주교도 자주 참석했었다.
장호원본당은 참으로 평화로운 시골 마을이었다. 하지만 본당 사목을 하다보니 이들에게 늘 자리잡고 있던 가난의 문제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고리대금업자의 돈을 빌어 쓴 후 높은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빚이 늘어만 갔고 추수한 쌀은 만져보기도 전에 고리대금업자의 손에 들어갔다.
모두가 가난했기에 이들은 구호물자를 얻거나 돈을 빌리기 위해 성당을 찾곤 했다. 그것이 세례의 동기가 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구호물자나 대출을 해주어도 여전히 가난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고민한 결과가 바로 「생산자 협동조합」이었다. 주임인 레이 신부도 흔쾌히 동의했다. 마을 주민들에게 함께 힘을 모아보자고 요청하고 우선 탈곡기를 한 대 구입해 추수한 쌀을 함께 탈곡해 비용을 줄이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성과가 없었다. 우리 농촌의 현실에 맞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고민은 더 커져갔다.
그러던 중 장호원본당 전 주임으로 충청북도 감목대리에 임명됐던 파디 주교가 이를 위해 보다 전문적인 공부를 해보라고 제안했다. 그래서 떠난 곳이 캐나다. 협동조합운동으로 유명한 캐나다의 안티고니쉬 운동을 공부하기 위해 나는 캐나다 유학길에 올랐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