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협동조합을 시작해서 가난을 구제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로 가득 한 농촌 현실을 보면서 이들을 가난에서 구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던 내가 캐나다 유학생활을 마치고 지도교수에게 한 대답이다. 이 말에 그 교수는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하되, 계속해서 확실하게 하십시오』라고 조언을 주었다.
1957년 나는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서 대망의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을 거쳐 캐나다의 노바스코시아주의 수도 할리팍스 공항에 도착한 나는 혼자서 「안티고니쉬(Antigonish)」타운을 찾아갔다. 나는 이곳에서 세인트 프란시스 세비어 대학에서 공부를 하기로 돼 있었다. 이곳에는 나처럼 고국의 가난을 물리칠 방법을 찾기 위해 유학온 보드리코, 가나, 브라질 출신의 신부 3명이 더 있었다.
노바스코시아는 불어로 뉴 스코틀랜드라는 뜻으로 캐나다 동부 대서양 연안에 자리하고 있는 반도이다. 농토가 비옥하고 천연자원이 많지만 이곳의 주민들 역시 예전에는 빈곤에 허덕이는 가난한 땅이었다.
세인트 프란시스 세비어 대학을 중심으로 일어난 협동조합운동은 바로 이곳의 가난을 물리쳤다. 이것이 그 유명한 안티고니쉬 무브먼트이다. 탐킨스(James Tompkins) 박사를 비롯한 몇 명의 학자들은 농어촌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이 운동의 청사진을 마련했고 코디(M. Coady)박사는 협동조합 운동가들을 배출해냄으로써 이들의 활동을 통해 노바스코시아주는 점차 가난을 이기고 부유한 지역으로 다시 탄생했다.
이 운동의 성공은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에게 큰 희소식이었다. 개발도상국들에서는 이 운동의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 캐나다를 찾아왔다. 나 역시 그 중 한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뼈빠지게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우리나라 농민들의 모습을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고 오직 빨리 이 운동을 한국에서도 펼칠 수 있기만을 바랐다.
2년 동안의 유학 생활을 마친 나는 미국 포담대학 대학원에서 사회사업공부를 더하려 했으나 1년이 채 못돼 당시 청주대목구장이었던 파디 (James V. Pardy) 주교가 귀국을 요청함에 따라 한국으로 돌아왔다.
두달 여 동안 장호원본당에서의 보좌신부 생활을 거쳐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여기서부터 나는 캐나다에서 배운 신용협동조합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가난으로 고통받았다. 외국 구호단체의 구호물자로 연명하는 것이 일상화됐던 당시 자립은 먼 일이었다.
국가 경제의 재건은 정부와 국민들의 지상과제였다. 정부는 5개년 계획을 수립해 경제 재건에 나섰고 캐나다에서 공부할 당시 잠시 만났던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는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신협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나는 1959년 8월 당시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의 후원으로 서울 중구 소공동 경향신문사 5층에 사무실을 내고 신협운동을 본격화했다. 그해 10월 신자들로 구성된 「협동경제연구회」와 만나 협력 방안을 모색했고 이로부터 교회 안에 신협이 탄생하게 됐다.
서울, 인천, 대구 등 전국 본당을 돌며 신협운동을 소개했고 서강대와 효성여대 등 대학에도 돌아다녔다. 신협이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어 처음에는 호응이 낮았지만 나는 신협운동이 가난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순회강연을 계속했다.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말처럼 가난과 빈곤을 이겨내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오직 모든 사람이 가난의 구렁에서 헤어나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한가지 이상만으로 나는 꿋꿋하게 이 일을 계속했다.
강연과 함께 신협운동을 이끌어갈 평신도 지도자들을 발굴하고 양성하는 일에도 주력했다. 노동부에서 일하던 박희섭씨, 서강대학교 임진창 교수, 곽창렬씨 등을 내가 공부한 캐나다의 대학으로 유학을 보내는 일도 알선했다.
1960년 6월 그 첫 결실을 보았다. 서울에서 처음으로 신협이 결성된 것이다. 「협동경제연구회」를 중심으로 「가톨릭 중앙신용협동조합」이 결성됐고 나는 첫 지도신부를 맡았다. 나는 즉시 노기남 주교의 편지를 들고 홍콩으로 가서 독일의 구호단체인 「미제레올」홍콩지부를 찾아 한국교회의 신협운동 지원을 호소했다. 그리고 그 지원으로 서울 마포구 동교동에 「협동조합연구원」을 설립해 일꾼들을 지속적으로 양성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이후 신협운동은 급속도로 확산됐고 이제 신협은 서민들을 위한 금융기관으로 뿌리를 내렸다.
1963년 나는 사제로 서품된지 13년만에 처음으로 본당 주임으로 사목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 주임신부로 발령을 받은 후암동성당은 일본인이 운영하던 사찰로 사용하던 건물이어서 새로 성전을 지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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