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지은 후암동성당은 공사 시작 1년 3개월만에 마침내 완공됐다.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보일러시설을 갖추는 등 초현대식 건물로 지어진 성당은 장안의 화제가 됐다. 그 때문에 성전 건립을 준비하던 다른 본당, 특히 멀리 부산에서도 사람들이 올라와 견학을 하곤 했다.
수녀원과 유치원 건물까지 새로 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본당 사목에 열중하던 나는 또다시 느닷없는 발령을 받았다. 서울교구장 노기남주교가 보낸 서한에는 이민단을 이끌고 브라질로 가라는 부탁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민단은 당시 매우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해 잡음이 끊이지 않았고 골치 아픈 일들이 많았던데다가 나는 평양교구 소속이었기에 여러 차례에 걸쳐 간곡하게 거절했다. 로마에서 공의회에 참석하고 있던 한국교회 주교들이 브라질 이민단 지도신부로 나를 추천했다는 서한을 주교 8명의 서명과 함께 보내왔지만 그래도 나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결국 평양교구장이었던 캐롤 안(George Carrol) 주교의 명에 따라 지도신부를 맡아야 했다.
1년을 기한으로 나는 1965년 11월 17일 이민단에 앞서 브라질로 향했다. 브라질 파라나 주의 폰타그로사 시 교외의 산타 마리아 농장에 도착해 이민단이 거주할 집을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일들을 여러 차례 겪은 후에야 나는 집을 짓기 시작했고 채 집이 완성되기 전인 1966년 초 55일간의 긴 항해를 마친 53세대 400여명의 이민단이 도착했다. 3000평 정도의 땅에 집을 짓고 입주했으며 나중에 모두 69세대가 이곳에서 한인 공동체를 형성했다. 3월에는 성당과 사제관도 마련했다.
이민단들 중에는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이들을 이끌고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보였다. 더 나은 삶은 커녕 살아남는 것조차 막막했다. 급기야 첫날부터 몇몇 사람들이 짐을 싸들고 농장을 떠나겠다고 나섰다.
농장 전체 면적은 468만평 정도, 꽤 넓은 땅이었지만 경지로 쓸 만한 땅은 그 3분의 1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가톨릭구제회에서 제공한 비상식량이 떨어지기 전에 수확을 거둬야 했기에 우리는 서둘러 농지 개간에 들어갔다.
간신히 개간을 끝내고 제일 먼저 볍씨를 뿌렸다. 인근의 일본 이민자들에게 경비행기를 빌려 씨를 뿌리고 농약을 살포했으며 벼 외에 감자 농사를 병행했다. 간신히 수확한 것이 쌀 500포대와 감자 300포대, 살 길이 막막했다. 굴하지 않고 양계사업도 시작했다. 1만여마리의 닭을 키우게 되면서 우리는 간신히 먹고 살 걱정은 덜기 시작했다.
농사를 짓는 일도 힘들었지만 아이들의 교육 문제 역시 매우 심각했다. 교육 때문에 농장을 떠나는 식구들도 있었다. 또 69세대 중 39세대인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 생활도 엉망이었다.
그래서 나는 신앙생활을 강조했고 특별히 아이들의 신앙 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신학생도 양성했다. 당시 4명의 자녀가 폰타그로사 교구의 신학교에 진학했고 그 중 한명이 사제가 됐다.
브라질의 자랑거리는 무엇보다 축구이다. 브라질의 축구사랑은 정말 유별났다. 농장의 아이들이 축구를 잘한다고 자부했던 나는 브라질 아이들과의 축구시합을 잔뜩 기대했다. 결과는 10대 0 완패였다.
브라질 사람들은 바쁠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귀국 준비를 할 때였다. 나는 먼저 짐을 싸서 한국으로 부쳤다. 하지만 한국에 오니 짐이 도착하지 않았다. 후임 신부를 데리고 다시 브라질에 가서 확인하니 짐은 그대로 창고에 있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운송비를 다시 물고 또 짐을 부쳤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짐은 오지 않고 있다.
정신없이 약속한 1년이 지났지만 서울교구에서는 후임에 대한 연락이 좀처럼 없었다. 농장 가족들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반년 정도 더 버틴 나는 1967년 6월 서울로 왔다가 12월 후임신부를 데리고 다시 산타 마리아 농장으로 돌아왔다.
이때 서울교구가 추천한 브라질 농업 이민이 좋은 성과를 거둠에 따라 정부 실무 담당자가 현지를 시찰하고 정부 보조금을 농장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보건사회부의 왕과장이라는 사람이 함께 갔다.
공식 일정을 마친 나와 왕과장이 귀국하기로 한 날, 현지에서 농장을 운영하던 조일행 회장과 왕과장이 그만 차량 전복 사고로 사망했다. 슬픔에 빠진 이민 가족들과 함께 조회장의 장례 미사를 후임신부가 폰타그로사 교구 주교좌 성당에서 치렀고 왕과장의 장례를 리우데자네이루의 한국 대사관에서 치렀다. 슬픔에 빠진 이들을 두고 올 수가 없었던 나는 폰타그로사로 다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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