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아산지방으로부터 태안반도에 이르는 일대의 평야를 내포(內浦)지방이라 한다. 이 내포평야의 접경에 천안군 「여사울」이란 곳이 있다.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는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 해당하는 여사울에서 이존창(루도비코, 1752~1801, 일명 단원)은 농가의 양민으로 태어났다. 그는 타고난 재주가 비상하여 처음에는 자기 집에서 글을 배우고 있었으나, 더 깊은 학문에의 열정으로 스승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 때 삼남에 그 위명이 자자하던 권일신선생 형제들을 알게되어 그의 문하에 들어가 제자가 되었다. 권일신은 젊고 총명한 농민출신의 학자인 이존창의 자질과 품성에 이끌려 그에게 마음을 쓰고 있던 중, 천주교를 신봉하게 되어 사베리오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하였다. 사베리오는 즉시 이 신앙의 은혜로움을 제자인 이존창에게 전하였다. 스승은 제자에게 특히 천주교에서 믿어야 할 중요한 신조뿐만 아니라 천주교인의 본분과 그 실천방법까지 철저히 전수하였다.
이존창이 루도비코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을 때, 스승 권일신은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그에게 일깨워 주었다. 그는 스승의 명에 따라 고향으로 가서 머무는 동안 가족과 친척, 그리고 벗과 이웃들에게 천주교를 전하였고 그의 지식과 덕행을 보고 끌려오는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저 유명한 내포천주교회의 기초가 이렇게 이루어 진 것이다. 이존창에 의해 이루어진 내포천주교회는 다른 어느 곳보다 열심했고, 이후 백년간의 박해 때마다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여 한국교회의 굳건한 토대 역할을 해냈다. 그리고 이 지역에 복음을 널리 전파한 이존창은 오늘날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게 되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은 열렬한 신앙심과 학구심을 갖고 있었기에 한국초대교회에 있었던 평신도에 의한 임시성사집행기에 그도 평신도의 임시 성직단(聖職團)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품성사를 받지 않고 성사와 전례를 집행하는 것이 잘못인 줄을 알자 그 일을 즉시 중단하고 사제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어 윤유일, 지황, 최인길 등과 함께 사제영입운동을 도와 마침내 주문모 신부를 맞아들이는 데에 기여하였다.
그는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당하여 심한 고문과 교활한 꼬임에 빠져 한 때 배교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도 베드로처럼 즉시 뉘우치고 이 배교에 대한 양심의 가책으로 그의 땀이 어린 고향 내포지방을 떠나 새로운 회개의 삶을 살게 되었다. 홍산(鴻山)으로 이사한 그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며 더욱 열심히 수계생활을 하고 전교에 힘썼다. 이로 인하여 그의 눈물과 땀으로 전교한 내포와 홍산 지방에서는 박해 중에 불굴의 증거자들이 잇달아 배출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의 집안도 그의 전교로 입교하였는데, 김대건신부의 할머니가 그의 조카딸이 된다. 그리고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이며, 실로 이 땅에서 12년간 사목활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오늘이 있도록 기여한 최양업 신부는 그의 생질의 손자가 된다. 이렇게 그가 전교한 그의 친인척 가운데 사제가 배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전교한 결과로 입교하게 된 한국초대교회의 신자들에 의해 오늘날의 교회가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그의 활동은 온갖 기대를 넘어서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우의 상당부분이 그의 전교로 입교한 교우들의 자손들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전교상의 공헌은 지대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1795년 말에 이존창은 지방관리들에 의해 다시 체포되었다. 그는 고향인 천안으로 이송되어 사도직 활동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강제로 연금생활을 하게 되었다. 연금생활 중에서도 이존창은 열절한 기도와 탁월한 교리지식으로 주변에 많은 감화를 주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정조가 재위 24년만에 승하하고 열한 살의 어린 나이로 순조가 왕위를 계승하자, 궁중의 어른인 정순왕후 김계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권력의 변동이 일어나면서 한국교회는 최초의 전국적인 박해인 1801년의 신유박해를 맞게 되었다. 이때 이존창은 6년간의 연금생활 끝에 그 해 3월 18일(음력 2월 5일) 다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1801년 4월 8일 명도회 초대회장 정약종 선생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의 사형은 출신지 감사가 있는 곳인 공주로 호송되어 이루어졌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 그의 일생은 사도적 열성으로 불탔고 그의 전교업적은 교회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약점을 멍에처럼 지니고 있어 한차례 나약한 배교의 아픔을 체험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차라리 이 약점 때문에 더욱 그를 가까이 하고 싶어진다. 그의 뉘우치는 삶은 잘못을 참회하는 깊이 만큼 짙고 치열하였다. 이 뉘우침과 회개의 삶과 보속을 본받고 싶어진다. 이 화해의 새 삶이 그를 내포의 사도가 되게 하였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공주에서 장렬하게 참수되어 순교할 때,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역사는 내포가 늘 열심한 천주교인들과 훌륭한 순교자의 못자리로 기억될 때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도 함께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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