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쥬리아가 일본 고오즈섬에서 순교한 것이 아니라 일본 본토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해마다 열려온 「쥬리아제」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이에 가톨릭신문사의 후원으로 쥬리아의 사적을 추적해온 이원순 박사(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의 특별기고 「새로운 세기의 쥬리아제」를 2회에 걸쳐 싣는다. 쥬리아의 증거자적 삶을 되짚어 보고 한·일간의 사랑의 가교로 이어가자는 내용이다.
매년 5월 제3 주말에 일본 동경에서 바닷길로 6시간 거리에 위치한 태평양의 고오즈섬(神津島)에서 한국계 기리시땅(가톨릭 신자)인 오다 쥬리아를 현창하는 쥬리아제가 거행되어 왔으며, 한국 순례단도 이 제전에 참가하여 쥬리아의 성스러운 천주 신앙을 현창해 왔다.
그런데 2000년 5월 10일 동경대주교 白柳誠一 추기경이 「오다 쥬리아 표경회(表慶會)」 해산 조치를 승인함으로써 작년의 31회 쥬리아제를 끝으로 이 순례 제전 행사에 대한 동경대주교구의 공적 후원은 일단 끊기게 되었다. 이런 사실은 작년 31회 쥬리아제에 참가했던 한국 순례단에 의해 확인된 바 있었다(31회 쥬리아제를 주관한 오다 쥬리아 표경회 회장대행 靑山和美 신부가 한국 순례단에게 전달한 2000년 5월 21일자 서면을 통해서도 확인).
오다 쥬리아 표경회가 이처럼 고오즈섬 사목담당 책임 주교에 의해 승인이 취소된 것은, 지금까지 믿어 왔던 것과 달리 쥬리아가 고오즈섬에서 순교한 순교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학문적으로 밝혀짐으로써 취해진 조치로 파악된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연행된 조선 부로(강제 납치된 민간인)의 한 사람으로 기리시땅이 되었던 오다 쥬리아가 신앙 때문에 고오즈섬으로 유배당하는 고초를 겪은 일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져 있던 것과 달리, 그녀가 그 섬에서 피흘려 순교하고 고귀한 생을 마치신 성녀는 아니며, 어느 시기에 고오즈섬에서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일본 본토로 귀환하여 나가사키, 오사카 등지에서 천주 사업에 헌신적으로 봉사하다가 본토에서 돌아가셨음이 새로 발견된 사료에 의하여 밝혀졌다.
쥬리아는 자신을 고오즈섬으로 추방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사망한 1616년 이후 어느 때에 고오즈섬에서의 유배생활에서 벗어나 본토로 귀환하여 나가사키에서 어린이들의 신앙생활을 돕는 하느님 사업에 헌신하다가 수차에 걸쳐 나가사키 부교(행정 사법 최고 책임자) 앞에 연행당하는 고초를 거듭 겪었으며, 그 후 다시 오사카로 옮겨 모라레스 신부나 예수회 관구장 파체코 신부의 도움을 받으며 활동했음이 그들 성직자의 친필 서한에 의해 밝혀진 사실이다. 유감스럽게도 현재의 자료로는 그녀가 어느 때, 어느 곳에서 고귀한 생을 마쳤는지를 밝힐 사료가 없다. 따라서 고오즈섬에 자리잡고 있는 이른바 쥬리아의 묘탑(墓塔)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을 쥬리아의 것으로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연구사료의 세계적 색출과 그것을 자료로 하는 학문적 연구가 진전되면서 이러한 사실이 확실해지자, 작년 11월에 오카다(岡田) 동경대주교는 금후 오다 쥬리아에 대해서 순교자라는 표현을 쓰지 말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그동안 임란 조선 부로의 문제에 대한 개인적 학문 욕구에서 오다 쥬리아의 사적을 추적해 오던 필자는 가톨릭신문사의 도움을 얻어 고오즈섬 현지의 쥬리아에 대한 학문적 답사를 실시할 수 있었다. 또한 섬 사람들이 받들어 오는 호토오사마(寶塔樣) 공경과의 관계를 조사할 수 있었다.
학문적 답사
고오즈섬 사람들은 그 어느 때의 일인지 모르나, 험악하고 인적이 드물던 그 옛날, 아리따운 이국 여성 한 사람이 일본의 지배자인 쇼군(將軍)의 특명으로 이 섬에 귀양 왔고, 고난을 이겨내며 자기 신앙을 굳게 지키며 고귀하게 살다가 생을 마쳤다고 전해지는 전설적 여인을 섬의 수호신처럼, 자신들의 삶의 귀감의 여인으로 모시게 되었으며 그녀의 묘탑으로 알려진 석탑을 정성으로 모셔왔던 것이다. 섬 사람들의 지극한 숭경은 어느덧 그들의 민속신앙으로 후대에 이어져 내려왔던 것이다. 섬 사람들의 민속 신앙으로 정착한 호토오사마 숭경의 원형을 이 섬에서 고귀하게 신앙적 삶을 살다가 이 섬에서 생을 마친 이국 출신의 여성인 오다 쥬리아로 비정(比定)하게 되어, 쥬리아 사마에 대한 민속신앙으로 정착했던 것이다.
현재까지의 연구로도 오다 쥬리아의 생년(生年)과 졸년(卒年), 출생지나 그녀의 가문 사정도 알수가 없고, 한국 성명도 알 수가 없다. 일본에서 전교활동 중이던 서양 선교사나 그녀와 만난 일이 있는 일본 출입의 서양인들의 기록을 통하여 파악되는 확실한 사실은, 그녀가 어린 시절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가족을 잃고 전선을 헤매다가 기리시땅 장군이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의 왜군에 수습되어 1592년 말경에 일본 땅, 고니시의 거성인 우토성(宇土城)으로 보내져 고니시의 부인(쥬스다라는 세례명의 열심한 기리시땅이었다)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고, 쥬스다 부인의 인도로 1596년 5월에 당시 큐우슈우 아쿠사섬(天草島)의 지기(志岐)에 있던 예수회 수도원의 원장이던 모레혼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기리시땅이 되었다.
그러나 그후 1600년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쟁(關原合戰) 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반역자로 처형됨으로써 그녀의 신분이 도쿠가와 가문에 예속되자 그녀의 그리스도 신앙 생활은 파란에 휩싸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야스 궁전에서 여관의 직책을 수행하는 이방인이면서도 궁내 뭇 여성들로부터 신망을 받았고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한편 많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가면서 천주 신앙을 지켰고, 궁외 성직자와 통하면서 교회 활동을 여러모로 도우며 그리스도적 사랑의 실천에 힘썼다. 그러나 1612년 4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기리시땅 금령(切支丹禁令)이 선포되고 자신의 주변 기리시땅을 색출, 박해를 가하게 되면서 쥬리아는 배교의 유혹과 영화의 유인을 물리치고 원도유배(遠島流配) 조치를 달게 받고 오오시마(大島) 니이지마(新島)를 거쳐 고오즈섬으로 추방되어 유적(流謫)의 고난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태평양의 외딴 섬에서 오직 하느님과의 일치만을 바라는 한편, 당시 주민이 많지 않았던 고오즈섬 사람들과의 일치에도 힘쓰며 고결한 그리스도 신앙을 실천하던 쥬리아는, 자신을 추방시킨 이에야스가 사망한 1616년 후, 나가사키에서 도밍고회가 조직한 신심단체인 산타 콩프라디아(Santa Confradia)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는 기록을 담은 도미니코회 사루바네스 신부의 서한이 작성된 1620년 사이의 어느 해에 고오즈섬에서의 한많은 유배생활을 마치고 일본 본토로 귀환했으며, 그후 나가사키 오사카 등지에서 교회를 위해 일하며 자신을 봉헌하는 신앙 생활을 실천하다가 삶을 마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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