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선교(宣敎)의 여명기에 지역마다 첫 복음을 전한 사도(使徒)들을 볼 수 있다. 예컨대 내포 지방의 이존창, 호서와 호남의 포교자 권일신, 전라도의 유항검 등이다. 그리고 포천(抱川)지방의 지도자는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737~1801)이다.
황사영은 그의 「백서」 제41행에서 홍교만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홍 사베리오 교만은 권철신의 외숙으로 경기도 포천에서 살았습니다. 젊어서 진사시에 합격하고 늘그막에는 경학(經學)을 좋아하였는데, 권씨네 집안에서 성교를 믿자 그 역시 믿고 좇았습니다. 그는 벼슬할 생각을 끊고 고향의 이웃 사람들을 권유하여 감화시켜서 한 고을의 영수(領袖)가 되었습니다」라고 하여 고향 마을에서 신앙의 지도자가 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천주교에 대한 전국적인 박해는 1801년 신유박해였다. 그 때, 이러한 초대교회의 사도들 대부분이 순교하였다. 순조(順祖) 원년 2월 26일(양력 1801년 4월 8일)에는 6명의 귀중한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했는데, 홍교만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도 그 중에 포함되어 있다.
그는 천주교인들 사이에서 남양(南陽) 홍씨로 알려진 남인의 양반집 자손이었다. 일찍이 학문에 증진하여 진사가 되었고, 그의 점잖고 사려 깊은 성격과 여러 가지로 풍부하게 쌓은 지식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얼마 동안 서울에서 머무른 다음, 포천현(지금 경기도 포천군)으로 가서 살다가 천주교에 대한 말을 들었는데, 아마 그와 사돈간인 권씨 집안을 통하여 들었을 것이다. 그는 천주교를 이내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나중에 그의 아들 홍인 레오에게서 설명을 듣고 권고를 받아 주문모 신부에게서 세례성사를 받은 뒤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가 세속의 영광을 누릴 만했으나 인간의 영광과 세속의 복락에는 생각을 두지 않았다. 그는 또 수많은 외교인 친구들과 교제를 끊었는데 그런 행동으로 받게 될 비난은 개의치 않았다. 자기 본분과 가족을 가르치는데 전심하여 냉담자를 회개시키고 천주교를 전파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리하여 그의 고향 포천에서는 그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그의 집에 모여든 교우들이 항시 끊이지 않았으며, 그는 이들을 격려하고 권면하느라 여러 밤을 세우며 지내는 일이 자주 있었다.
포천의 사도 홍교만은 그의 고향에서 이렇게 훌륭한 지도자가 되어 신앙의 초석을 깔고 복음 선포의 굳건한 기반을 닦아 나갔다. 그러던 중인 1801년 정조가 재위 24년 만에 승하하고, 정순왕후 김계비는 이를 기회로 국법을 악용하여 국가기강을 바로 잡는다는 명분으로 정치적 보복을 행하며 천주교를 박해하게 되었다.
박해령이 내렸을 때에 홍교만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는 아들과 함께 서울로 피신하였다. 한 동안 서울에 숨었던 그는 오랫동안 피신할 수 없음을 알고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하느님의 섭리에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그런데 그는 서울에서 돌아오는 길에 포졸들을 만나 체포당해 도로 서울로 압송되었다.
재판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관변측 기록인 신유추안(辛酉推案)에는 그와 함께 체포되어 순교한 초대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문초와 형벌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볼 수 있다.
홍교만은 1801년 3월 27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울 포졸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다가 불과 10여 일 남짓한 그 해 4월 8일 서소문 밖에서 정약종(丁若鐘), 홍낙민(洪樂敏), 최창현(崔昌顯) 등과 함께 참수 순교하였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으나 혹독한 형벌과 심문은 가혹하였는데 홍교만은 당당하고 의연하게 신앙을 고백하며 증거하였다.
그의 당찬 모습에 대해서는 당시 그를 심문하고 형벌을 가했던 관리들이 홍교만의 결안(結安)에 다음과 같은 말을 추가로 더 적어 넣은 것으로 인해 오히려 그의 인내와 끈기에 대한 훌륭한 찬사로 남게 되었다. 『그는 뻔뻔스럽게도 그의 종교를 위하여 죽는 것이 행복하다고 감히 말한다. 그의 고집은 목석보다 더 강하다. 그에게는 모든 형벌이 너무 가볍다』그 무렵 순교자들과 그리고 배교자들의 모습을 보며 증언을 남긴 사람들은 그들의 증언 끝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처음에는 굳세다가 마지막에는 굴복하는 자가 많다. 죄를 지은 뒤에 다시 일어나고, 배교하였다가 순교자가 되는 것은 보통 일도 아니고 쉬운 일도 아니다』 그렇다. 순교자들 가운데도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한때 배교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적인 연민이 어려 더욱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주저함도 없이 불꽃처럼 산화해 간 순교자들에게는 더욱 순연한 「성령의 승리」를 사무치게 느끼게 한다.
홍교만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는 그의 고향 포천의 사도로 밤하늘의 불꽃처럼 64세의 한평생을 주님 대전에 빛나는 증거자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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