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에서 돌아온 나는 후암동에서 3년 정도 더 사목하다가 대방동 주임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후 상도동, 종로본당까지 나는 성전 건립을 위해 공사판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보냈다. 그래서 좥집 짓는 사제좦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대방동성당에 가니 마치 시골 본당에 온 기분이었다. 넓은 마당이 덤불과 나무, 온갖 잡초로 무성했다. 사제관은 거의 흙벽집이었다. 여름이면 성당 마당의 벌레들이 인근 집으로 떨어져 민원이 쏟아지기도 했다.
장마때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자 높이 8m에 달하는 축대가 무려 50m나 무너져 내렸다. 다시는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튼튼하게 축대를 다시 지은 뒤 이듬해에는 사제관도 다시 짓고 소성당과 회의실도 세웠다. 후암동성당을 지을때처럼 나는 그때마다 공사판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감독을 했고 그 때문에 내 손마디도 노동자들처럼 거칠어져 있었다.
대방동성당에서 5년 내내 공사만 하던 나는 1976년 5월 상도동본당 주임으로 부임했다. 성전을 신축하려던 계획을 못이뤄 섭섭하기는 했지만 상도동본당에 오니 이곳도 역시 성전을 다시 세워야 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공사를 3년이나 끈 후에서야 성당이 완공됐고 사제관과 수녀원을 포함해 1979년 8월21일 봉헌식을 가졌다.
1981년 가을 종로성당으로 부임한 나는 도시개발계획에 포함된 성당을 지키기 위해 분투해야 했다. 당시 그 일대는 도로도 좁고 한옥과 낙후한 상가 건물들이 밀집돼 있어서 서울시는 이 지역을 개발해 도로를 넓히고 성당 옆의 종묘를 공원화하기 위한 개발계획을 추진했다. 이 바람에 종로성당도 철거대상에 포함됐다.
나는 당시 서울시장까지 찾아가 종로성당은 반드시 보존돼야 한다고 설득했고 마침내 설계도를 다시 작성하기까지 하면서 성당만은 지킬 수 있었다. 다만 성당 터 일부가 도시계획에 포함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1년이 넘도록 이어진 공사의 와중에 성당 유치원이 전기누전으로 불에 탔다. 하지만 나는 하느님의 도우심을 확신하고 본격적인 성전 신축에 들어갔다. 기존의 건물을 완전히 헐어내고 새 건물을 지어야 했기에 모든 성당 식구들이 이사를 가야 했고 창경궁 뒤의 상가 건물을 임시성당으로 사용했다.
당시 본당 신자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기에 신축기금을 마련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교구로부터 일부를 보조받고 성당 소유 묘지를 대대적으로 조성해 팔았으며 각 본당을 돌아다니며 모금활동을 했다. 신자들은 나름대로 바자회를 개최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한 결과 성전이 완공될 무렵 공사비가 모두 모였고 빚이 하나도 없이 성전을 봉헌할 수 있었다.
1987년 잠원동으로 옮긴 나는 더 이상 성전을 짓는 공사판을 벌이지 않아도 좋았다. 신자들의 가정 형편도 괜찮았고 성전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곧 나는 또다시 공사를 시작해야 했다. 주일학교 교리실과 회합실이 턱없이 모자라 교육관을 신축해야 했던 것이다.
잠원동으로 부임한 이듬해인 1988년 2월22일은 내 생애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새벽미사를 봉헌하던 내가 제대에서 쓰러진 것이다. 오른쪽이 마비돼 수족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건강에는 자신 있었던 내가 입원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세월은 속일 수 없었다. 의사는 뇌졸중이라고 했다. 반신불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눈앞에 캄캄했다. 하지만 열심히 치료를 받은 나는 보름만에 일어났다. 그해 가을 올림픽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나는 대회를 보기 위해 도시락을 싸들고 경기장을 전전했다. 뇌졸중으로 의기소침해있던 나는 올림픽 대회 덕분에 다시 자신감을 되찾았다.
마지막 일터인 수유1동 본당에 부임한 것이 1994년 9월9일, 그 때 나이 72세였다. 지금까지의 왕성하고 거창했던 사목활동과는 달리 수유1동에서는 그저 신자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찾아와 주님을 만날 수 있는 하느님의 집이 되도록 애썼다.
어느날 나는 갑작스럽게 은퇴하라는 전갈을 받았다. 금경축까지는 사목활동을 하다가 은퇴하리라고 생각했고 금경축까지는 3년이나 더 남았다. 하지만 1998년 10월9일 나는 은퇴했다.
평생을 하느님의 집에서 살아오던 나는 여기 저기 집을 구하러 다니는 것이 그렇게 처량할 수가 없었다. IMF 경제 위기로 거리에 내몰린 실직자들과 같은 심정이었다. 외딴 곳에 귀양살이 온 기분으로 송파구 신천동에 아파트를 마련하고 실의에 빠져 있던 나는 그러나 곧 기운을 차리고 일어섰고 요즘에는 신천동본당의 '제2보좌(?)'를 하면서 지낸다.
지난해 11월21일은 사제서품 50주년이었다 김수환 추기경과 윤공희 대주교, 나 굴리엘모 주교를 비롯해 동료 사제들이 잠원동성당에 가득 찼다. 내가 거쳐온 본당에서는 은경축, 환갑, 수품 40주년과 칠순 등 매번 내게 정성스러운 잔칫상을 차려주었다. 이처럼 감사한 일은 내가 주님을 모시는 목자의 길을 걸어왔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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