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관(地官) 신부」, 「수맥(水脈) 박사」
수맥의 전도사로 만 40년의 사제 생활을 포함해 모두 60여년 동안 수맥을 찾아 전국을 누빈 까닭에 갖게 된 이 별명들 덕에 조용히 물러난 지금도 교인은 물론 비신자들에게 유명세를 치르느라 혼이 나고 있다.
멀리서 찾아오는 이들이 내 지난 삶을 보고 싶다는 통에 서가에 꽂힌 낡은 사진첩을 가끔씩 꺼내 들춰볼 때가 있다. 빛이 바랠 대로 바랜 사진첩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살아오며 참 별의별 일을 다 했었구나 싶어 감회에 젖을 때가 적지 않다. 두꺼운 검은 종이에 누렇게 변색된 조그만 사진에 실려 있는 지난 시절은 그 사진들만큼이나 보잘것 없는 것 같으면서도 남들이 아껴주는 만큼 소중한 기억의 편린들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여든이 넘은 삶을 더듬다 보면 살아오면서 사진이 남겨온 삶보다는 몇 갑절 많은 무수한 체험을 하고 또 그 체험들보다 몇십 곱 많은 사색과 고심을 더했던,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다 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유난히 많고 궁금증을 많이 달고 다닌 소년이었던 것 같다. 「지관 신부」니 하는 별명을 갖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어릴 때부터 그 싹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1923년 10월5일 황해도 은율군 이도면 고정리에서 어버지 임근배(가브리엘)와 어머니 양병순(마르타)의 7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증조부 대부터 4대에 걸친 독실한 구교우 집안이었던 탓에 나는 태어나자마자 유아영세를 받았다. 현재 나를 제외한 우리 형제들이 남한에 퍼뜨린 자손만 100여명이 넘고 있으니 하느님의 은총이 많은 집안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조부모님과 부모님, 그리고 형제 등 적잖은 가족들이 한집에 살았었는데 지금의 기억에도 공소회장이던 할아버지는 열심한 신자이셨던 것 같다. 5, 60명쯤 되는 신자가 있는 공소일을 하면서도 새벽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으실 만큼 묵주신공을 열심히 바치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내가 소신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방학 때 집에 오면 할아버지는 그 연세에도 불구하고 내게 다가오셔서 『네가 수도원 갈 요량 없냐?』고 묻곤 하실 정도로 깊은 신앙을 지니신 데다 구도의 길을 걷지 못하신 걸 못내 안타까워 하셨던 분이다. 『네가 신부가 되면 꼭 너한테 고해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사제의 길을 걷기 전 6·25로 두 번 다시 뵐 수 없게 돼 소원을 들어드리지 못한 게 늘 가슴에 남는다.
같은 동리에 살던 작은아버지는 내가 사제의 길을 걷도록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소신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을 때 신학교 입학 절차 대부분을 직접 주선해주실 정도로 조카 신부 만들기에 공을 들이셨다.
우리 집안이 속한 본당은 황해도 신천본당이었는데 주임이 나중에 「조선어학회」에서 낸 「우리말 큰사전」의 천주교 항목을 집필하기도 한 신인식 신부님이셨다. 이 분과의 인연은 유별나 나중에 내가 혜화동 소신학교에 입학하고 나니 몇 달 안돼 소신학교 교장으로 오셔서 나의 어린 시절을 줄곧 지켜봐 주시고 이끌어 주신 셈이다. 특히 신 신부님이 처음 가르쳐 주신 「수맥 탐사법」으로 인해 나와 주위의 삶이 보다 평화롭고 풍요롭게 바뀌어 온 것을 돌아보면 신 신부님과의 만남은 하느님의 이끄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당시 우리 본당에서는 부활절이나 성탄절을 앞두고 꼭 찰고를 해 우수한 아이들에게 조그만 상패를 나눠주곤 했는데 나도 그 틈에 끼여 상패를 받던 기억이 지금도 뚜렷하다. 신앙 생활이 그토록 신나고 재미있었던 것은 아마 사제나 신자들이 삶 속에서 일상적인 생활과 믿음을 동일시하며 그만큼 노력을 같이 기울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런 집 안팎의 분위기 때문인지 고모님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입회하셔서 수녀가 되셨고, 6촌 동생들인 수원교구 임충승 신부를 비롯해 부산교구 양덕배 신부, 인천교구 강성욱 신부 등 적잖은 이들이 우리 가문에서 나 사제의 길을 걷고 있다.
내 이력 중에 특이한 것은 누구처럼 1을 출발로 삼지 않고 2를 출발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지금의 초등학교인 보통학교도 2학년부터 시작했다. 아버지의 권고로 이웃 마을의 일도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시험을 쳐서 들어갔던 것이다. 이는 어쩌면 다른 이들보다 늘 한발 앞서 당신의 길을 걸어가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당시 보통학교 3학년 교과서에 나폴레옹 이야기가 나왔는데 작은 키에 다부지게 생긴 품이 나와 닮았던지 그 과목을 함께 배웠던 친구들은 자연스레 나를 나폴레옹이라 불렀다. 이 때 생긴 별명은 신학교 때는 물론이고 지금껏 따라 다닌다. 그러고 보면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세상의 한 부분, 그리고 그보다 더한 숱한 사람들의 마음을 정복해 하느님께 바쳤으니 나폴레옹 부럽지 않다.
평소 세상일에나 하느님 일에나 관심이 많았던 소년은 이런 가운데 자연스럽게 한발한발 하느님께 이끌려 다가서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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