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성인이 사제품을 받았던 중국 상해 금가항 성당의 실측과 역사적 고증을 위해 지난 3월 24~3월 29일 상해를 다녀온 단국대 건축학과 김정신(스테파노) 교수와 한국교회사연구소 서종태(스테파노) 박사가 보고서를 완성했다.
다음은 두 전문가의 보고서 요지.
■ 실측 조사 보고서-김정신 교수
원래 건물 2번에 걸쳐 증축 사실 확인
상해 중국식 성당 건축 건립과정 파악
중국에서의 성당 건축 양식의 수용과 토착화 과정의 실증적 자료 확보
지붕 가구(架構)형식은 전통적인 중국 목구조의 대량식(擡梁式)으로 기둥을 세우고 그 상부에 대들보를 결구한 다음, 대들보위헤 대공(동자주)을 세워 가구를 구성하는 방식이다. 정면 횡축이 3칸, 측면 종축이 6칸으로 5량가(梁架) 구조이며 오른쪽 외부에 퇴기둥과 퇴보(退梁)로 회랑을 형성하고 있다.
정면이 보칸(樑間)으로 3칸, 측면이 도리칸(道里間)으로 6칸이 2번에 걸쳐 증축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즉 제단으로부터 3번째 칸(御間)을 중심으로 전후 한칸씩 모두 3칸이 원래의 구조이고(처음엔 도리칸이 정면이었을 것으로 추정됨), 축을 바꾸어 측면이 정면으로 되면서 여기에 전후 한칸씩이 더붙고, 최종적으로 앞부분에 한칸이 증축되었다. 이렇게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각 횡렬의 가구형태가 상이하고 천장재료및 벽체재료(전벽돌)에서 증축의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상보 4월 8일자 4면). 한편 금강항 성당은 69.04평. 기념관은 1, 2층 합쳐 31.8평, 제의실 9.2평으로 측량됐다.
이번 금가항 성당 실측조사연구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김대건 신부의 수품장소가 확인되었다. 과거 수품장소가 철거된 성당인지? 아니면 그 옆의 기념관인지? 또는 이 대지내의 남아있지 않은 다른 건물이었는지? 의견이 분분했는데, 건물의 증축사실과 문헌기록, 그리고 중국신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상해에서의 중국식 성당건축의 건립과정을 어느정도 알 수 있었다. 즉 명말(明末) 서광계 등의 지식층을 통해 천주교가 수용되었으나 상해의 구도시보다 황포강 건너 시골에 먼저 성당이 건립되었다는 점. 박해기(18세기, 19세기 전반)를 거쳐 제2차 서세동점으로 상해가 개항되고(1842) 황포조약의 체결(1844)로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었을 당시에는 상해에 큰 성당이나 서양식 성당이 전무하였다는 점. 따라서 60여평에 불과한 금가항 성당이 남경교구 주교좌 성당이 될 수 있었다.
셋째, 중국식 성당 건축의 구조와 내부공간 구성 및 장식상세 등을 알 수 있었다.
넷째, 중국에서의 성당 건축 양식의 수용과 토착화 과정의 실증적인 자료가 된다. 우리나라와 유사하게 중국도 자신의 전통 건축 형식으로 서양 가톨릭의 전통적인 전례공간(바실리카식 공간)을 수용하였는데 그 과정은, 전통 기존 건물의 사용→축과 출입구 방향의 변경을 통해 가톨릭적인 내부공간 구현→종축방향의 증축을 통해 깊숙한 내부공간 연출/중국식 색채, 장식 부가→외관(정면)의 개조(종탑, 장미창, 아치 등)를 통해 가톨릭적 이미지 추구이다.
■ 철거와 그 대책-서종태 박사
상해종교지 등을 통해 발전사 고증
‘보다 일찍 조사연구’ 아쉬움 남아
복원·새성당 건립 등에 지원 필요
금가항 성당은 중국천주교회는 물론이고 한국천주교회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고 의미 깊은 성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귀중한 성지가 중국 상해시 정부의 포동 지역 개발 계획에 따라 철거되고 말았다. 철거를 막아보고자 그간 김로현 주교를 중심으로한 상해교구 신자들과 상해한인공동체의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역사적 비운을 맛보아야만 했다.
금가항 성당의 역사적 고증을 위해 「상해 종교지」「천사현지(川沙縣)」「양경향지(洋涇鄕誌)」등의 자료에 수록되어 있는 금가항 성당의 발전사를 살펴봤다. 이 자료들에 따르면 금가항 성당은 건립된 후 계속해서 발전해 온것으로 돼 있었다. 작은 성당에서 비교적 큰 주택을 구해 만든 교당으로, 다시 1841년에는 주교좌 성당으로 된 뒤 적어도 1847년까지는 주교좌 성당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1872년에는 700~800명 수용의 대성당으로 발전하고 다시 1922년에는 이를 확장, 수리하여 장관이 되게 했으며 1848년에는 일본군에 의해 파괴된 자리에 1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고딕양식의 성당을 건축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기존의 성당은 1872년 이전부터 있었던 건물이라는 점이다. 1872년에 새로이 건축한 성당은 기존의 성당을 놔누고 별도로 지어졌으며 일본군과 국민당에 의해 파괴된 성당은 오늘날 남아 있는 성당 건물이 아니라 그 옆에 신축한 것들이었다. 그때 파괴된 성당의 내부 바닥의 일부가 남아 있어 실측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천주교회는 그동안 금가항 성당의 철거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한 점을 깊이 반성하고 앞으로는 보다 더 적극적이고 합리적으로 대처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성 김대건 신부를 추앙하는 열기는 뜨거우면서도 김대건 성인의 자취가 남아 있는 유물이나 유적을 조사연구하고 보존하는 일에는 소홀한 것 같다. 김대건 신부가 서품을 받은 유적지로서 금가항 성당을 발견한 지 이미 십여 년이 지났고, 방명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국 천주교회의 많은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성지 순례 차 다녀갔음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금가항 성당에 대한 조사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작년 9월부터 계속 여러 경로를 통해 금가항 성당의 철거 소식을 전했지만 한국 천주교회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으며, 3월 15일 구성된 금가항 성당 문제를 논의할 한국 대표단에 국내의 교회사 관련 단체나 교회사가, 건축 전문가 등이 참여해 줄 것을 상해 한인 신자 단체가 한국 천주교회에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철거 직전에야 부랴부랴 교회사 전문가와 건축 전문가를 파견하여 건물에 대한 실측과 조사연구만 하게 하였다. 그 결과 이번에 철거하는 기존의 금가항 성당이 김대건 신부가 수품을 받은 바로 그 성당 건물임을 뒤늦게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조사연구가 좀 더 일찍 이루어졌더라면 금가항 성당의 보존을 위한 적절한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운 생각을 못내 떨쳐버릴 수가 없다.
지금부터라도 한국 천주교회가 금가항 성당에 관심을 더욱 많이 기울여 실측한 설계도를 바탕으로 금가항 성당을 복원하는 방법이나 새 성당을 지을 때 철거 과정에서 수습해 놓은 자재들을 활용하여 김대건 신부가 서품을 받았던 옛 성당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게 하는 방안 등을 찾아보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하려면 새 금가항 성당을 짓는 데 한국 천주교회가 물심 양면으로 적극 협력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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