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래 일각에서 의문이 제기되어 오면서도, 쥬리아가 고오즈섬에서 순교한 성녀에 비견되면서 또는 고오즈섬에서 오랫동안 유배 생활 끝에 그 섬에서 선종했다고 믿고 그 묘탑으로 순례 행렬하여 묘전에서 그녀를 현창하는 기구를 올려 왔었다.
하지만 쥬리아의 일생의 베일이 걷혀진 지금, 쥬리아를 고오즈섬에서의 순교자나 그 섬에서 종생한 성녀로 현창하며 쥬리아제를 지낼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조선 왕국에서 생을 받은 조선 처자인 그녀가 적지 일본 땅에서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연약한 여인의 몸이면서도 일본 땅에서 참 그리스도인으로 형극의 환경 속에서도 영성의 삶을 살았고, 한 몸으로 천주의 사랑의 진리를 증거한 증거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우리는 쥬리아의 이러한 천주 신앙을 일본 땅에서 전교 활동에 종사하면서 그녀와 신앙적 관계를 가졌던 예수회·도미니코회·프란치스코회 그리고 아우구스티노회의 여러 전교 성직자들의 친필 서한이나 공식 보고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쥬리아 자신이 귀양가기 직전에, 또는 고오즈섬에서 일본 본토의 성직자에게 올린 편지를 통해서도 오로지 주님에게만 의탁하는 그녀의 증거적 삶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고오즈섬에서 민속 신앙 형태로이기는 하나, 예부터 쥬리아를 숭경해 온 사실에서 하느님과의 일치, 인간과의 일치에 자신을 봉헌한 그녀의 증거자적 삶의 구체상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 한국인에게 쥬리아는 특별한 관심이 가는 우리 겨레 출신의 일본 기리시땅이다. 어린 몸으로 전선에서 일본군에 수습되어, 일본인 기리시땅 다이묘(切支丹大名, 기리시땅 신앙을 받드는 지방 제후)이며, 조선 침략의 선봉장으로 활약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가문에서 성장하고 기리시땅 신앙을 얻었다는 자체가 기막힌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일본의 정권 투쟁으로 그를 키워 준 고니시 가와 인연을 끊고 도쿠가와가(德川家)로 신분이 이속되고, 그런 가운데 이국인 출신이면서도 궁내 여러 사람으로부터 존경과 신망을 받으며 살던 기품 있는 여성으로 빛을 발한 점도 조선인 여성이었기에 우리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그녀는 일본 땅에서 본바닥 일본이 아니라 이국 땅 조선의 출신임을 지각했을 터이며, 원수의 나라에 살면서도 그리스도적 사랑의 믿음으로 원수를 넘어선 이웃 사람으로 살고, 이웃 사람에게 사랑을 증거했던 것이다. 박해받고 추방당하는 신분이면서도 자기를 낮추고 고난을 이겨내며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를 이웃 나라에서 증거한 조선인 기리시땅 증거자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쥬리아는 종래 알려졌던 것처럼 박해를 받고 피 흘려 영웅적으로 순교한 것은 아니나, 그녀의 신앙적 영성과 증거적 삶은 우리들 현대의 한국인이 현창하여야 할 것임을 확신한다. 비록 그 옛날, 이국 땅에서의 천주의 증거자이지만 우리들 한국인이 현창하여야 할 기리시땅이라고 믿는 것이다.
아오야마 신부의 호소
작년 5월에 거행된 31회 쥬리아제를 주관하고 당일 고오즈섬에서 현창 미사를 집전한 「동경교구 오다 쥬리아 표경회」 대표이던 동경대주교구의 아오야마 가즈요시(靑山 和美) 신부는 지난 3월 필자에게 자신의 글이 실려 있는 신앙 잡지 「家庭の友」를 보내 온 바 있다. 그의 글 가운데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우리들 일본의 가톨릭 사제 및 신도들이 지금 오다 쥬리아를 추억하고 그녀의 모범을 따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과 메이지 시대의 조선 병합 그리고 군대 위안부 문제 등 가지가지의 일본인의 죄를 보상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의 교감인 미사 성제를 한국의 여러분과 한마음으로 봉헌한다면 그것이 새삼스러이 고오즈섬 사람들과 일·한 양국의 모든 사람에 대해 오다 쥬리아와 같이 사랑의 증거자가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오다 쥬리아가 누리지 못하여 괴로워하던 미사를 지내 그녀의 영혼을 위로해 주기 바라던 고오즈섬의 요청」은 바로 도요토미 조선 침략에 의한 쥬리아와 당시의 조선 반도의 사람들에 대한 속죄의 실천이 아니겠습니까. 조선 병합이나 위안부에 대한 속죄를 단순히 경제적 문제로 좁혀서는 안될 것입니다. 속죄하는 진실한 마음이 수반되어야 할 것입니다. 현대에 사는 우리들 일본인에 요구되는 큰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 것일까요. 성서에 「나는 믿음의 자녀인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여러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그러나 혹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의로우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친히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요한의 첫 번째 편지 2장 1~2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그리스도의 용서의 기념이 미사가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한국의 여러분과 마음을 합하여 기념할 때, 우리들만으로 할 수 없었던 하느님과 한반도의 여러분과의 화해와 보속이 비로소 그리스도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요』
아오야마 신부의 호소와 같이 우리의 쥬리아는 그 옛날 조선 시대에 겪어야 했던 최대의 침략 전쟁을 배경으로 은수(恩讐)를 뛰어넘는 사랑의 실천과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해 자신을 낮추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영성적 삶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진리를 증거하신 분일 것이다.
그러면서 사랑의 실천을 연결 고리로 하여, 굴절된 오늘날의 한·일 관계에 믿음의 다리가 될 수 있는 우리의 기리시땅 증거자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녀 자신의 서신과 주변 성직자들의 서한으로 파악되는 그녀의 영성적 증거자로서의 생애와 더불어 한·일 간의 종교적 믿음을 통한 사랑의 일치의 가교자로 추앙하며, 그녀의 믿음의 유덕이 현창되어야 할 것이다.
순교자로서가 아니라, 증거자로서의 신앙과 한·일 간의 종교적 믿음의 가교자로 우리의 여인 오다 쥬리아의 천주 신앙을 현창하는데 21세기 새 시대의 쥬리아제의 의의가 설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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