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길에서 주위의 숱한 이들이 유명을 달리 하는 모습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당시 다리 하나 없던 부여 백마강에 이르러서는 어쩔 도리가 없어 발을 굴러야 했다.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인민군이 곧 들이닥친다는 소식에 애가 탔다. 강 건널 궁리만 하고 있는데 뜻하지 않게 군의 도하 책임을 맡고 있던 신자 장교를 만나 배로 무사히 강을 건넌 데다 지프차까지 얻어 타고 강계까지 무사히 닿을 수 있었다.
강계에서 나바위본당을 거쳐 고산본당 공소를 향하던 중 물을 얻어먹기 위해 들른 집이 교우집이어서 전쟁통에도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이어 전주로 방향을 잡고 가던 길에 찾아 들어간 집도 교우집이어서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피난길에 잠시잠시 전화를 피해 들른 집들이 묘하게 모두 신자들의 집이었던 것을 보면 하느님의 오묘한 이끄심이 아닌가 싶다. 죽음의 고비마다 함께 해주신 하느님 체험은 이후로도 이어졌다.
겨우 닿은 수류성당에 숨어 지내다 수원교구 류봉구 신부를 만나게 됐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갑자기 들이닥친 인민위원회 사람들에게 붙잡혀 류 신부와 배를 저장해두는 지하움막에 갇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칠흑같이 껌껌한 곳에 갇혀 있으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같이 갇혀있던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줬다. 세례를 준 이들 가운데 불려 나간 이들은 다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우리가 갇혀있던 이 배밭이 나중에 원평본당이 된 것은 무슨 인연인가.
이후 김제의 내무서로 끌려가게 됐는데 목숨이 촌각에 달렸음이 직감적으로 다가왔다. 류 신부와 내가 갇힌 곳은 7, 8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방, 그러나 20여명이 넘는 사람들로 채워져 앉아 있기조차 힘들었다. 꾀를 부려 내무원들이 지켜보는 앞에 관절염 때문에 서 있는 게 낫다며 서 있었는데 딴 방으로 옮겨주니 그야말로 천국 같았다. 감방장이 나를 좋게 봐 감방 밖까지 불러내 청소도 시키곤 했는데 이 때마다 도망갈 궁리를 했다.
혼자 도망칠 기회는 많았지만 내가 도망하면 함께 잡혀왔던 류 신부와 다른 이들에게 큰 피해가 갈 것 같아 그러지도 못했다. 그렇게 10여일을 갇혀 지냈다. 북한 출신인 내무서장이 매일 아침 정신교육을 시킨답시고 갇혀 있던 이들을 모아놓고 설교를 했는데 나는 그 때도 기지를 발휘했다. 열심히 듣는 척하며 맞장구도 쳐주고 기분을 돋궈주었다. 이런 행동이 먹혀들었던지 나를 포함한 몇 명이 풀려났다. 이때 함께 풀려난 예닐곱명을 제외하곤 갇혀 있던 4, 50여명이 모두 운명을 달리 했음을 떠올리면 지금도 등골이 서늘해진다.
풀려난 후 다시 전주를 향해 가다 한 젊은이를 만났는데 이번에도 공교롭게 신자였다. 그의 안내로 공소 회장집을 찾아 들어가 잠시 몸을 피할 수 있었다. 이튿날 새벽 불바다가 된 전주를 뒤로 하고 나바위로 향했다. 나바위로 가던 길에 열살이 갓 넘어 보이는 꼬마를 만났다. 아이의 안내로 삼례본당 회장집에 무사히 닿아 한달여를 전란을 피해 지낼 수 있었다. 또 한번은 국군이 군산에 상륙했다는 소문이 나 사람들 가운데서 만세를 부르자는 제안이 일었으나 나는 낌새가 이상해 회장집에 머물던 사람들과 집밖 논에서 밤을 나자고 했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아니나다를까 거리는 시체로 가득했다. 참 기이한 이끄심이 아닌가. 아마 내가 다가가고 있었던 죽음의 문턱마다 수호천사를 보내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곳에서 머물며 익산까지 나가 종부성사를 주고 오기도 했으니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며 당신의 일을 시키신 것만 같다.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안성으로 돌아왔다가 1?후퇴로 제주도로 피신해야 했다. 부산을 거쳐 다시 안성으로 돌아오니 성당은 감옥으로 쓰이고 있었다. 안성본당 주임 겸 안법중학교 교장으로 일하며 안법고등학교의 인가를 받으려 힘을 쏟았다. 당시 안성시가 학교 설립인가를 내주려 하지 않아 이 때도 꾀를 내 기어이 인가를 받아냈다. 학교운영이 성공리에 이뤄져 제 궤도에 오르자 주위에서는 대학교도 설립하자는 의견이 일었다.
휴전 후 청평과 대방동본당 주임을 거쳐 왕림본당을 맡게 되었을 때는 공소 신자들을 돌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관할 내에 공소가 서른 곳도 넘었는데 이 곳을 두 번씩 돌아보면 한해가 가곤 했다. 이어 맡은 발안성당은 손수 지어 노기남 대주교의 주례로 축성식을 가졌다. 성당을 지으며 교우들의 편의를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마을 사람들도 찾을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느라 공을 들였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사목을 하는 후배 신부들에게 신자는 물론 동네 사람들을 위해 열린 성당을 만들라는 당부를 꼭하고 싶다. 혼배 때보다 장례 때 선교가 잘 됐던 사목 경험을 돌아보면 어려움을 나눌 때 하느님이 인간에게 다가설 수 있는 장이 쉽게 열렸던 것 같다.
훌륭한 원예가는 식물의 목마른 소리를 알아듣고 제 때에 물을 줄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 자신이 사목하는 지역이 목말라 하는 것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참다운 사목자라고 할 수 없다. 전란과 전쟁 이후의 피폐한 가운데서도 하느님이 늘 내 눈과 귀가 돼주셨던 체험은 이후 당신이 마련하신 길을
걷는 내게 언제나 새로운 떨림을 주는 감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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