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4쪽에 불과한 적은 내용이지만 매주 때에 맞는 말씀과 가르침을 줍니다. 이제 주보를 읽고 묵상하는 일은 의식적으로 챙겨야하는 일이 아니라 밥먹듯 자연스런 일상이예요』
매주 누구나 한 장씩 가져가는 주보. 그러나 주일에 성당에서나 힐끗 볼까 집에 가져오면 분리수거감으로 처리되기 일쑤다. 윤점순(마리아·45·하양본당 동강공소)씨는 이 주보를 10여년째 매주 모아 그 내용을 묵상하는 것이 하루 생활의 버팀목이라고 말한다.
대구가톨릭대 학생회관 내 「윤미용실」. 여느 미용실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지만 중앙 탁자에 일반 잡지들과 함께 그득히 쌓인 교회잡지와 서적들이 눈길을 끈다. 특히 몇년을 모은 듯 두껍게 정리된 주보철이 유독 눈에 띈다.
윤점순씨는 틈만 나면 주보에 게재된 강론 및 묵상글, 성서구절 등을 꼼꼼히 읽고 묵상한다. 그리곤 화살기도를 바치거나 성서구절을 외우고, 혹여 길게 틈이 나면 묵상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겨우 4쪽인데 금방 읽지 않느냐는 질문에 윤씨는 『바쁠 땐 글자 한 자 볼 시간도 없다』며 『주보는 일상생활 중에 부담없이 보며 묵상할 수 있고 일상에 적용하기 쉬운 말씀들이 가득하다』고 말한다.
윤점순씨의 어머니는 손선지(베드로) 성인의 후손으로 윤씨도 어릴 때부터 남다른 신앙을 키우며 자랐다. 그러나 깊은 신심과 달리 검정고시로 중등교육을 마친 윤씨. 7년 전 어린이 미사에 나오는 주부들을 대상으로 레지오마리애를 창단했는데 단원들 대부분이 대학졸업자들인 것이 적잖이 마음에 걸렸다.
『단원들을 이끄는데에도 그동안 읽고 묵상해왔던 주보의 신부님 강론과 묵상글이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됐습니다. 매주의 성서말씀은 한주 생활을 하는 기본이 되잖아요』
윤씨는 주보 모으기, 쉬는 교우와 이웃들에게 주보 전해주기 등을 레지오 활동 사항으로 제시했고 단원들도 소홀히 했던 작은 일부터 꼼꼼히 실천하게 됐다.
윤점순씨가 주보에 더욱 애착을 가지고 스크랩을 시작한 것은 IMF를 맞으면서였다.
『친척 빚 보증과 은행융자 등으로 모든 것을 잃고 폐농가를 수리해 이사를 갔습니다. 게다가 남편에게 갑작스럽게 중풍이 오고, 시어머니마저 치매기운이 있자 정말 막막하더라구요. 그때 한줄기 빛으로 와 닿은 것이 주보에 실렸던 주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가정은 생명의 성역이며, 생명의 문화를 건설하는 가정의 역할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고 오히려 우리 시대에 가정은 더욱 사랑과 생명의 공동체로…』
윤씨가 기억해낸 것은 주보에 실렸던 바로 지난해의 교구장 사목지침이었다. 이 지침은 내 가정부터 내 손으로 지켜야한다는 생각과 새로운 힘을 불어 넣어줬다. 한 장의 주보에서 다시금 행복을 찾은 것이다.
남편 이재도(치프리아노)씨도 주보와 교회 서적들을 아끼는 건 매한가지. 그는 『신앙재교육 프로그램들이 많이 부족하고 바쁜 일상에 쫓겨 꾸준히 신앙교육을 받을 수 없는 이들에게 주보와 각종 교회서적들을 권한다』며 『우리 아이들에게 남겨줄 것도 제가 모아온 책 밖에는 없다』고 한다.
이재도씨가 지금껏 모은 고서적은 300여권 정도. 모두 발품을 팔며 헌책방에서 사 모은 것이다. 그 중에는 1921년에 인쇄된 성서며 성경직해, 천주실의, 전주교구 주보인 「숲정이」의 영인본 등도 포함돼 있다.
윤점순씨와 건강을 되찾은 이재도씨는 요즘 나란히 신학원에 다닌다. 여전히 폐농가에서 지내며 어려운 생활을 꾸려가지만 「선지 베드로네 집」이라는 문패가 붙어있는 윤씨의 집에는 오늘도 구석구석 「천상 말씀」의 재산이 그득히 쌓여간다. 그리고 두 부부는 『많은 신자들이 주보를 소중히 하고 더욱 많은 이들에게 나눠줬음 한다』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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