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네 번째로 맡게 된 왕림본당은 1887년에 설립돼 적잖은 역사를 지닌 본당이었지만 문화적 혜택을 입지 못해 전기도 안 들어와 밤이면 촛불을 켜고 생활을 해야 했다. 나중에 본당이 된 발안공소를 비롯해 오산, 조암, 남양, 정남, 종남, 사강공소 등 수십곳의 공소를 일일이 걸어다니며 사목을 한다는 것은 지금의 사목자들은 아마 상상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앞서 사목을 하던 서울 대방동본당에서 다시 왕림으로 가게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사제수품후 세번째 사목지인 대방동본당을 초대 주임으로 부임해 미군으로부터 구호물자를 얻어 성당을 짓고 성모유치원도 새롭게 만들며 자리를 잡아갈 무렵이었다. 어느 날 왕림본당 주임을 맡고 있던 신부가 나를 직접 찾아왔다. 당시 왕림본당 주임은 본당에서 운영하던 광성국민학교와 더불어 중학교 인가를 받으려 했는데 이게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안법중고등학교를 운영했던 내 소문을 들었음인지 뜻밖에도 나와 본당을 바꿔 중학교 인가를 받아달라는 게 아닌가. 일찌감치 그 곳의 어려움을 체험했던 터라 고심이 될 만도 했지만 「하느님이 또 나를 부르시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 노기남 대주교로부터 허락을 얻어 본당을 맞바꿔 다시 시골 본당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그러나 안법중고등학교 때와는 달리 그 곳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나 다름없어 누구 하나 교사로 오려는 사람이 없어 끝내 중학교 설립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나 그 때나 드는 생각이 무슨 일을 하든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유형의 자산이 있어도 이를 다스릴 사람이 없으면 그만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하루하루를 살며 사람 대하기에 정성을 쏟는 편이다. 일선의 사목자들이 사목을 함에 있어서도 한사람 한사람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 가장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당시는 공소를 찾게 되면 본당과 공소와의 거리가 멀어 꼭 자고 와야 했다. 한번은 겨울에 정남공소를 방문했다 큰 일을 당할 뻔했다. 공소 회장이 공소에 군불을 때 줘 잠자리에 들었는데 자다가심상치 않은 기색에 눈을 뜨니 문 밖이 벌건 것이 아닌가. 문을 박차고 나오니 아니나 다를까 공소에 불이 번지고 있었다. 한겨울에 물을 퍼다 불을 끄는데 온통 물을 뒤집어써도 추운 줄을 몰랐다.
왕림본당에 있으며 공소이던 발안을 본당으로 승격시키는 소임을 맡아 새 성전 짓는 일도 해야 했는데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어렵게 성전을 봉헌하고 발안본당 주임으로 가서는 내 사목 기간 중 가장 오랜 7년을 있으며 사목의 맛에 심취했다. 이 시기에 남양공소 등 관할 공소에 기성회를 만드는 일에 힘을 많이 기울였는데 지금도 본당이 활력을 얻으려면 신자들이 중심이 된 기성회가 잘 돼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이 때 「사목일지」라는 걸 처음으로 만들었다. 매일매일의 미사 참례자 수를 비롯해 혼례성사나 종부성사 같은 성사자 수, 헌금, 영세자 수 등 본당 운영과 관련된 각종 자료를 일일이 기록해 사목의 현재를 파악하고 지난 일을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삼았던 것이다. 이 일은 7년 내내 이어졌는데 한번은 노기남 대주교가 와선 보고 다른 사목자들에게도 전해야겠다며 가져가기도 했다.
다시 서울로 올라온 것은 62년 삼각지본당 주임을 맡으면서였다. 가난한 지역이었던 관계로 적산가옥을 불하받아 임시로 쓴 성당에는 수도시설도 제대로 없어 물을 길어다 써야 했다. 이어 이태원본당을 거쳐 명동성당 수석보좌로 오게됐는데 이 때 주임이 이문근 신부였다. 보좌로 있으며 본당에 연령회를 처음으로 만들었는데 이 연령회가 지금의 「용인천주교공원묘지」를 마련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후 가회동본당 주임으로 있을 때 용인묘지에 손수 터를잡고 공사비를 감당해 「성직자묘역」을 조성했는데 그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발안과 가회동본당에 있을 때 성당 안에 물자리를 잡아 우물을 팠는데 발안의 우물은 지금까지 잘 쓰고 있다는 얘기를 듣곤 한다.
명동 보좌에 이어 1970년 11월부터 공항동본당 주임으로 있을 때 교구 사목국장이던 최석호 신부를 통해 「은퇴사제 후원회」를 만들 것을 건의했다. 이 뜻이 받아들여져 지금도 사제들간에 「(서울대교구) 사제공제회」로 이어져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렇게 은퇴한 원로사제들을 위한 장을 마련할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은 교회가 보통 4, 50년의 사목 경험을 지닌 은퇴사제들의 능력을 사장시키고 있지 않나 하는 안타까움에서다. 은퇴사제들의 경우 비록 일선에서는 떠났지만 본당이나 자신이 경험을 지니고 있는 사목현장에 대한 사목적 조언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조언이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한 자부심이나 자랑 차원에 그쳐서는 안될 것이며, 또 사목자는 주위의 비평을 고맙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지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여기고 끝까지 서로에게 사랑과 책임을 다할 때 교회 발전은 물론 아름다운 하느님나라를 이 땅에서 먼저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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