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분열과 혼탁함이 내재돼 있던 당시 교회를 정화시킨 사람. 바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인이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던 프란치스코는 부유함과 쾌락을 즐기던 부류의 사람이었으나 꿈속에서 체험한 하느님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형제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교회 안에서 교회의 사명을 실천해갔다.
1209년 교황 인노첸시오로부터 공동체의 생활양식을 구두로 인준받고 1221년 호노리오 3세에 의해 창립된 프란치스코회는 어떤 사업이나 고유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복음을 삶으로써 스스로 복음화되고 또 형제들을 복음화 시켜갔다.
프란치스코의 영성은 앞서 언급한 복음적 삶과 선교, 그리고 작음과 형제애의 영성이라 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과 형제들의 삶을 '순종하며 소유없이 정결하게 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2회칙 1,1)으로 제시하며 당시 일반화되어 있던 정주적(定住的)인 수도승의 양식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과 사도들처럼 일정한 거주지 없이 순회하며 설교하는 생활을 수도생활의 기본으로 삼았다.
아울러 프란치스코는 성직자 중심의 수도생활 양식과 수도자 중심의 생활양식을 벗어나 귀족, 평민 모두에게 수도생활을 개방했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여자들을 위한 프란치스칸적인 공동체(성 글라라 수녀회)를 창설하였고 평신도들의 프란치스칸적인 생활을 위해 제3회를 창설, 평신도들의 수도생활을 도왔다.
프란치스칸의 거룩한 복음을 따르는 생활은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한 생활이다. 그는 자신과 초기 형제들이 선택한 생활양식을 교황 성하로부터 인준받으려고 노력했다.
프란치스코는 당시 교회에 반기를 들며 교회 없는 삶의 구조를 추구하는 복음적 운동들의 오류를 깊이 인식하며 그 근본적인 이유를 교회 안에서 삶을 택하지 않은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주 형제들이 교회와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최대한의 존경과 사랑을 드리라고 명했으며, 입회의 조건에 있어서도 '가톨릭 신앙과 교회의 성사'에 대한 시험을 전제로 하기도 했다. 프란치스코는 어떤 속화되고 불쌍한 사제를 만난다해도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라고도 가르쳤다. 그래서 그는 회칙의 마지막 부분에서 '형제들은 거룩한 교회의 발 아래 항상 매여 순종함으로, 가톨릭 믿음의 기초 위에 굳건히 서서 우리가 굳게 서약한 가난과 겸손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도록 합시다'라고 선언했다.
교회 안에서 교회의 사명에 이바지하도록 불림 받은 작은 형제들은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인 선교에 앞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작은 형제들의 선교 역사에 있어서 교회사적으로 의의를 갖는 것은 당시 그리스도교와 가장 적대적이었던 이슬람교도들을 한 형제로 받아들이고 홀몸으로 동방으로 건너가 이슬람의 술탄을 만나 평화와 화해의 정신을 전한 것이다. 그 후 지금까지 성지 이스라엘은 작은 형제들의 배타적인 선교지로 사도좌는 인정하고 있고, 회교도들도 작은 형제들만을 로마교회의 공식적인 대표자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같은 스승의 선교 모범은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와 그리스도교들에게 프란치스카니즘을 심어왔고 또 오늘날에도 아프리카, 러시아, 중국, 태국 등지의 선교를 활성화하고 있다.
프란치스코회의 공식 명칭은 작은 형제회다. 프란치스칸 영성을 요약해주는 말로서 작음과 형제애를 바탕으로 복음적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이 「작음」의 정신은 가난과 겸손이라는 덕목을 포함하고 있어 작은 형제들은 가난하시고 겸손하신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의 삶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소외된 이들과 하나가 되며 그들로부터 복음화되고 복음화시키는 것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인식하고 있다. 또 가난한 자들처럼 일과 노동을 통해 땀흘려 일하고 소박하고 단순한 생활을 영위하며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처럼 하느님께 신뢰하며 복음적 불안정의 삶을 살아간다.
프란치스칸들은 이와 함께 어머니가 자식을 기르고 돌보는 이상으로 형제들 상호간에 기르고 돌보는 정신을 자연과 우주 만물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시켜 가고 있다. 바로 이 우주적인 형제애, 만인의 형제가 되는 것이 프란치스칸의 형제애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이같은 프란치스칸의 정신은 작은 형제회를 비롯해 1517년 분리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와 1528년 분리된 카푸친 프란치스코회가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