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 4월 25일 여주(驪州)고을에서는 다섯 증거자들의 거룩한 죽음이 있었다. 28세의 원경도(元景道 요한), 53세의 최창주(崔昌周 마르첼리노), 50세 가량의 이중배(李中培 마르띠노)와 정종호(鄭宗浩), 그리고 나이도 세례명도 알 수 없는 임희영(任喜永)이 그들이다.
이제 이들 증거자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1800년 3월 위의 다섯 증거자 중 대표격인 이중배와 원경도가 정종호의 집에서 부활축일을 함께 보내다가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형벌을 받고 있을 무렵에, 같은 고을인 여주에 임희영이란 양반이 살고 있었다. 그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은 열심한 신자였으나 그만이 고집을 부리며 신앙생활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는 신앙생활이 자신에게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일이라며, 『천주교를 충실히 신봉하려면 눈도 귀도 또 다른 모든 관능도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의 아버지가 아무리 권고하고 타일러도 그는 결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죽게 되어 그를 불러 마지막으로 간곡히 말했다. 『내가 죽기 전에 네가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을 보면 이 세상을 떠나도 아무런 한이 없겠다』
그러나 아들은 역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버지는 다시 말하였다. 『네 태도를 보니 내가 죽은 뒤에 조상들에게 드리는 관례적인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것 같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았으니 이제 잘 들어라. 네가 나 죽은 뒤에 제사를 지내면 너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겠다. 그러니 네가 제사를 지내려거든 상복도 입지 말아라. 내가 내 자식으로 알지 않는데 상복을 입을 것 없다!』
이 말은 실로 그에게는 놀라운 충격이었다. 차라리 무서운 저주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임희영은 묵묵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죽음을 앞두고 자식에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이렇게 분노에 찬 극단에 이르게 되고, 마침내 부자의 의를 끊겠다는 말을 했어도 다만 침묵하고 있는 임희영의 묵묵부답은 참으로 기이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틀 후 그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말이 없던 임희영은 분명한 애통의 표시를 하고, 상복을 입었다. 그러고는 아버지의 자식으로 아버지의 유언을 지켜 관례적인 제사는 하나도 드리지 않았다. 그의 모든 일가친척과 친지들은 그를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불만과 불평을 숨기지 않았다.
경신년(庚申, 1800년) 봄에 소상(小祥)이 돌아왔는데, 그는 아무런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이와 같은 행동이 알려지자 여주목사가 포졸을 보내어 그를 체포하고 문초를 했다. 『나는 네가 천주교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네가 부모 제사를 올리지 않는다고 비난하니,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너를 죽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임희영은 그의 아버지 앞에서처럼 오직 침묵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도 옥으로 끌려가 이중배와 원경도 등 그의 동료들과 함께 옥고를 치르며 천주교 신자들과 같이 취급당했다. 1800년 10월에 증거자들은 감사 앞에 다시 불려 나갔다. 그 날 감사는 배교한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즉시 석방하여 자유의 몸이 되게 하겠다고 부드럽게 회유했다. 그러나 증거자들의 용감한 신앙고백이 있을 뿐 감사의 회유가 통하지 않았다. 감사는 그들 모두를 결안(結案)하여 서명을 시키고 모진 매를 때려 하옥시켰다.
세례도 받지 않았고 다만 침묵해 아직 외교인인 임희영은 다른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한 달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심문을 받았지만 줄곧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혹독한 형벌에도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았다. 감사가 『너는 천주교 신자도 아니면서 왜 제사를 드리지 않는가? 끝내 제사 드리기를 거절한다면 죽이겠다』고 위협했으나 임희영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10월의 심문이 있은 후 이제 죽음이 다가옴을 느끼면서 같이 있던 교우 한 사람이 임희영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하느님을 공경하지도 않으면서 그대가 당하는 형벌은 아무 소용이 없소. 오히려 굴복하고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더 나을 거요!』하고 말하였다. 그때서야 임희영은 비로소 대답을 했다. 『저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에 유언을 하시면서, 「나를 위해 제사를 드리면 내 아들이 아니니 상복도 입지 말라」고 말씀하셨소. 그런데 이제 내가 상복을 입었으니 어떻게 내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제사를 드리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소. 나는 나를 죽이면 죽을 뿐이지 제사는 결코 드리지 않겠소!』하고 결연히 말을 맺었다.
옥중의 교우들은 그의 굳은 결심과 효성을 보고 그를 권고하여 교리를 가르쳤다.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효성은 아버지와 함께 참신앙을 가짐으로써 더욱 완성되는 것임을 이해시킨 것이다. 임희영의 아버지께 드리는 효성은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효성으로 승화되어 마침내 신앙에로 이르게 했다. 그는 옥중에서 대세를 받고 그의 동료들과 함께 기쁨에 찬 순교의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나이도 그리고 세례명도 전해지지 않은 순교자 임희영은 그 효성이 신앙으로 승화된 가장 한국적인 순교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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