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동료들이 세상을 떠났다. 물론 아직 생존해 있는 동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되돌아 보면 『이 세상살이라는 것이 뭐 그리 남다를 것이 있겠는가』하는 생각이 든다.
신문사의 인터뷰 요청을 받고 『내게선 크게 기대할 것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다. 나는 올해 81세로, 현재 생존해 있는 대전교구 사제로서는 가장 나이가 많고 또 서품도 가장 먼저 받았다. 나는 작년 10월에 금경축을 지냈다. 아마도 이런 외형적인 이유 때문에 나의 「노사제 회고」를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내가 나고 자란 어릴적 환경이나 일제시대 신학교 생활, 6·25 전란과 사제서품 등 내가 겪은 일은 나와 같은 연배의 사제들의 이야기와 대동소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80년 인생, 그리고 50여년의 사제생활을 되돌아 보는 이 순간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하느님을 좀더 가까이 느끼고, 혹 사제직을 희망하는 젊은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9남매의 넷째 아들
나는 1921년 2월 14일 공주군 신풍면 평소리에서 아버지 유요셉과 어머니 김아가다의 9남매중 넷째로 태어났다. 형제는 모두 7남 2녀였는데 위로 형이 세분 계셨고, 남동생과 여동생이 각각 둘씩 있었다. 원래 본향은 강릉이었으나 할아버지가 6세때 박해를 피해 지금의 고향인 평소리에 정착했다. 사람들은 이곳을 「사랑골」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은 당시엔 공주 중동본당 관할이었으나 지금은 유구본당 관할 공소로서 아직도 유씨 집안 10여세대가 살고 있다.
어릴적 기억이라고 특별한 것은 없다. 부모님은 두분 모두 신앙생활에 열심이셨다. 나는 어릴적부터 부엌에서 아궁이에 불을 때고 밥을 하시면서 묵주알을 굴리며 기도를 하시던 어머니 모습을 보았고, 저녁을 준비하시면서도 마당을 거닐며 묵주기도를 바치던 어머니 모습을 보며 자랐다.
아버지는 자식들의 신앙교육에 매우 엄하셨던 분이었다. 주일 공소예절 후 찰고시간에 교리문답이나 기도문을 다 외우지 못해 종아리를 맞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부모님들은 두분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는 내가 소신학교(동성상업고등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러 간 중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사제품을 받고 몇 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당시 우성보통학교(4년제)를 거쳐 홍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7~8세때부터 복사를 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부터 주위에선 늘 신학교에 가라고 말하곤 했다. 가장 적극적으로 권하신 분은 작은 아버지셨는데, 그분은 신학교에 다니시던중 1919년 3·1운동때 밖을 나가지 말라던 학교의 명령을 어기고 월담을 해 만세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하신 분이었다.
나는 그때 신부가 뭔지, 신학교가 뭐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그냥 신학교에 가야하나 보다고 생각했다. 본당 신부님 등 주위에서도 신학교에 갈 것을 바라셨는데 그것은 아마도 다음에 말하는 몇가지 에피소드와도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릴적부터 제법 눈치도 빨랐고 머리도 꽤 잘 돌아갔던 것 같다. 학창시절엔 장난끼도 많아 동료들이 골탕을 먹는 일도 종종 있었다.
장난끼 많은 소년
보통학교에 진학할 무렵 있었던 몇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한번은 신부님이 미사때마다 마시는 포도주가 하도 먹고 싶어 몰래 마시고는 모자라는 만큼 물을 부어놓았다. 그리곤 미사가 시작됐는데 신부님께서 포도주를 성작에 부은 뒤 물이 없다며 물을 가져오라시는데 나는 속으로 『내가 물을 다 부어놓았는데 왜 또 물을 가져오라시나』고 생각하며 신부님께서 내가 포도주 마신걸 아시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그때부터 가슴이 뛰고 무서워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쌍뚜스」(거룩하시다)를 할 때 칠 종을 깜빡 잊고 가져다놓질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입으로 『딸랑 딸랑』하며 종소리를 내었고 다행히 미사는 무사히 끝났다. 미사후에 신부님께서 종을 왜 안쳤느냐고 물으시자 나는 『입으로 소리를 내도 신자들이 따라 움직이던데요』하고 대답했다. 신부님께선 어린 놈이 제법 머리가 있구나 하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또 한번은 신부님께서 『장독대 밑에 보면 밤이 있다』고 해서 하루는 내가 그 밤이 먹고싶어 장독대 밑을 파내다가 그만 장독을 넘어뜨려 깨트린 일이 벌어졌다. 식관에서 나를 혼내자 나는 신부님께서 장독대 밑에 밤이 있다고 해서 그랬다며 억울해했다. 신부님께선 이 일을 겪으시며 나의 순종하는 마음을 읽으셨던 것 같다.
홍성보통학교를 졸업한 나는 고등과 2년을 더 다녔다. 당시 고등과 담임이던 일본인 우찌아게 선생이 2년간 학비를 모두 대주며 공부를 시켜줬다. 고등과를 마친 후 나는 38년에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입학동기로는 부산교구의 박문선 김태호 신부, 서울대교구 장대익 신부, 임응승 신부가 아직 살아있고, 돌아가신 분으로는 전 대전교구장 황민성 주교, 대구의 장병보 신현옥 신부, 전주의 김종택, 이대권 신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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