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화 사건」 이후 나는 말수가 적어지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친구들과 어울릴 수 없다는 자격지심이 고개를 들면서,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책을 가까이하기 시작했다. 「보물섬」이며 「삼국지」등 세계 명작들을 만화와 소설로 읽으며 외로움과 소외감을 달래었다.
이것은 나에게 새로운 발견이었다. 독서하는 동안에는 내가 다리 병신임을 깨닫지 않아도 되었고, 무엇보다도 책 속의 등장 인물들이 나를 반갑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나의 친구가 되었으며, 그들의 정서와 대화는 나에 대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한즉 나중에는 책을 읽는 것이 매일 내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변화가 있었다. 가장 가까운 어머니에게조차 털어놓기 어려운 심정을 일기에 담게 된 것이 이 무렵이었다. 오늘날 나에게 문학에 재능이 있다면 바로 그때 씨앗이 뿌려진 셈이다.
그러던 중 같은 해 여름 어머니에게 호된 꾸중을 들었다. 하루는 점심 시간에 슬그머니 교실을 빠져나와 집 근처에 있는 숲으로 갔다. 어머니께서 약에 쓸려고 시골에서 가져온 흑염소를 그 곳에 메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미 친구들과 다른 세계에서 살던 나로선 이 귀한 손님이 떠올라 좀이 쑤셔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다. 흑염소는 『음메에―』 하면서 나를 반기었고, 상처받은 동심을 순하디순한 짐승에게서 위로받은 나는 한참 함께 지내다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를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을 때, 내 앞에는 어머니가 서 있었다. 이날 집에 끌려간 나는 어머니의 눈물 어린 하소연을 들었다. 『네가 학교 수업을 빼먹다니 웬일이냐? 너는 장차 훌륭한 의학박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너처럼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데 한눈 팔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이 말씀은 어머니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두 분 부모님께서 오래 전부터 곧잘 하시던 말씀이었다. 「그래! 의학박사가 되자!」 나는 어머님과의 약속을 실현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해에 무참하게 산산조각이 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 7월 4일, 어머니께서 교통 사고로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이날 시골 할머니 댁에 다녀오는 길에 들렀던 유달산 비탈길에서였다. 운전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차가 구르자, 어머니는 우리 삼남매를 밖으로 모두 내던지고 차와 더불어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병원으로 급히 옮겼으나 어머니께서는 사고 세 시간 만에 돌아가셨다. 그야말로 당신 목숨을 바쳐 자식들을 살린 고귀한 희생이었다.
난데없이 발생한 이 사고는 나에게 견디기 어려운 충격과 슬픔을 주었다. 어머니께서 어린 삼남매 대신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이 세상에서 다시는 어머니를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죄스러움과 슬픔이 되어 어린 마음을 마냥 아프게 하였다. 게다가 어머니는 생전에 이 병신 자식 때문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고 고생하였으며, 또 얼마나 가슴에 비수가 박혔던가! 이것들을 떠올리면서 나의 내성적인 성격은 더욱 안으로 조여들었고,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에 잠을 설치곤 하였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는 재혼을 하였다. 새어머니는 상냥하고 전처 소생들에게 정을 주려고 애썼다. 두 동생들은 오래지 않아 새어머니를 잘 따랐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럴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오직 생모뿐이었다. 그래서 밖으로만 나돌던 무렵 교내 웅변대회가 있었다. 나는 학급 대표로 뽑혔다.
지난날 「축구화 사건」으로 남 앞에 나서는 걸 기피하는 터였지만 이번에는 친구들의 전폭적인 추천으로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이미 백일장에서 입선하는 등 글짓기에 자질을 보인 것이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게 된 동기였다. 이에 나는 원고를 만들어 열심히 연습했다. 더욱이 풍부한 성량을 가지고 있어서 모두들 내가 입상할 것을 예상했다.
마침내 교내 대회를 맞았다. 그런데 웬걸! 내 차례가 되어 연단에 오르자 장내는 별안간 악머구리 끓듯 하였다. 이를테면 다리 병신이 연사였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이…』하고 시작했으나 이내 소란스러움에 파묻혔다. 나는 강행했다. 어느 누구도 무례한 관객들을 진정시키지 않은 가운데 나는 끝까지 외쳐대고 연단을 내려왔다. 『와!…』 대단한 구경인 양 떠들어대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교실로 돌아온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불현듯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워 서럽게 울었다. 나는 외톨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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