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 사태와 함께 세계는 달라졌다』, 『10년전 냉전이 종식된 이후 이제 우리 문명 세계에 대한 테러와 함께 이 21세기 최초의 전쟁과 함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라고 많은 이들이 말합니다. 신부님께서 생각하시는 테러이후 세계의 흐름, 그리고 그안에서 교회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견해를 들려주십시오. 또한 9.11 테러가 다양한 종교들에 미칠 영향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미래의 평화 형태에 대한 고민 필요
▲현재 정치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폭력에 대항해서 다시금 폭력으로 대처하는 것입니다. 즉 폭력의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확대입니다. 교회는 그것에 대항해 맞설 뿐 아니라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우선 종교들간 대화를 나누어야 할것입니다. 왜냐하면 문명과 문명간 싸움뿐만 아니라 종교간 갈등 분쟁 또한 세상을 위해 결코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지금 우리는 금융시장과 세계 경제의 엄청난 세계화 정책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 안에서 정의로운 세계화를 위한 하나의 로비(Lobby)가 되어야 할것입니다. 테러 이후 세계의 흐름이 종교에 미치게 될 파급 현상은 두가지입니다. 첫 번째 종교와 폭력의 관계는 어떠한가? 두 번째 정의 위에 건설될 미래의 평화는 어떤 형태가 될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아마도 종교계가 새로운 시기에 가장 심각하게 고민할 사항이 될것입니다.
-대화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신부님께서는 다양한 종교들 사이의 대화가 세상안의 폭력을 줄일 수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종교간 대화 세상의 폭력 줄여
▲확신합니다. 지금 이곳 빈에는 이란의 카타미 대통령이 방문해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외무부에서 가톨릭 이슬람 고위 인사들간 대화를 위해 준비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스트리아 정부의 오래된 전통중 하나입니다. 제 생각에 이러한 대화 노력은 세계의 평화 정착에 매우 바람직한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같은 종교간 대립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갈등해소를 위해 가톨릭 교회가 떠맡을 수 있는 몫은 어떤 것이라고 보십니까.
▲저는 무엇보다 먼저 이스라엘과 팔레스티나 문제에서 다음의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라파트와 라빈이 맺은 평화조약에는 『앞으로 각 국민은 상대편 국민의 고통을 기억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명시돼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평화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신학적 표현으로 compassion 즉, 『함께 고통을 느낌』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다른 이의 고통 아픔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평화정착을 위해 다양한 방안들을 모색할 것입니다. 이 말은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의 고통은 바로 나의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세계화 물결은 평화 속의 복지보다는 더 가난해지고 약해지는 소외된 사람들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등으로 일컬어지는 세계화의 미래를 전망해 주십시오.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회들이 공존하기 위해서 교회가 보여야할 예언자적 소명 혹은 책임은 어떤 것입니까?
자유와 연대를 동시에 내세워야
▲원칙은 자유와 연대를 동시에 내세우는 것입니다. 19세기 초 프랑스 사회 철학자 라꼬르떼르(Lacordaire)는 『자유가 정의를 단념케 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현재 우리는 경제의 자유 즉 금융시장의 자유와 통상의 자유를 위해 상당히 공세적인 정치를 펼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은 산업화가 실시되고 자본주의가 자리잡기 시작했던, 또한 저항적 사회운동이 성행하던 19세기 유럽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예컨대 유럽의 맑시즘이나 사회주의자들이 보였던 사회운동은 일방적인 면만이 부각되었는데 최근의 유럽통합에서 볼 수 있듯, 평화 공존을 위해서는 지나치게 사유화하는 경제적 프로젝트를 시행하는 것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회내 약자들에 대한 배려가 포함된 사회적 안정을 찾는 것이 함께 추구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의없이는 평화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정치를 하는 조직이 아니라 사회의 양심과 같은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예로 오스트리아에서는 주교들이 사회내 각 계층 대표들과 사회적 상황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이를 토대로 사목교서가 발표되곤 합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사목교서 발표가 아니라 교회 장상들이 일반인들과 마련하는 만남의 자리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서 「삼천년기」에서도 언급되었듯 보편교회는 한국을 비롯 아시아교회가 삼천년기 새로운 복음화의 표징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어떤 문화적 언어적 통일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재화와 자원 역시 불균형하게 배분돼 있는 상황인데 그같은 기대가 가능할런지요? 아시아 교회의 비전을 어떻게 보십니까.
종교적 대화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
▲새복음화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발견한 단어가 아니라 교회가 받은 지속적인 계약입니다. 「새복음화」는 하나의 「주제어」(Leitwort-이끄는 단어)인데 이 주제어는 차후 다른 단계들을 이끌어주는 첫 단계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사목신학에서 말하는 주제어는 아직 시간속에 실현되지 않은, 즉 문화적인 맥락안에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아시아 상황을 예로 들자면 -타이완에 있는 친구들을 통해서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새복음화는 이 지역에서 두가지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하나는 도교 불교등 많은 전통적 종교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의에 의한 희생자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복음화는 항상 종교적인 대화와 가난한 사람을 위한 선택이라는 이중성을 띠고 있습니다. 새복음화 과정에서 요청되는 교회의 특별한 「예술적 능력」은 이 두가지를 항상 동시에 시행하는 것이지 어느 한가지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70, 80년대를 거치면서 신자율의 급속한 증가와 역동적 활동으로 전 세계 교회의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이지만 90년대와 새천년대에 들어서면서 신자율 증가는 미미하고 쉬는 신자들은 늘고 있는 등 여러 문제점에 직면해 있습니다. 지난 여러세기 흥망성쇠를 겪은 유럽교회 전문가로써 조언해 주실바가 있으시다면 .
‘확신을 가진 신자’로 변모해야
▲한국에서 가까운 타이완 교회는 방문한 적이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는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타이완의 경우 그곳에도 소위 「쌀신자」라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됨으로써 실질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나쁘게 여겨지기 보다 타이완 교회가 성장하는데 큰 역할을 한 계기로 평가받고 있었습니다. 이를통해 사람들은 가난과 소외된 삶으로부터 그들을 여러 측면에서 강하게 엮어주는 네트워크에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그런 시기가 지났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한국교회도 「원조받던 신자」에서 「확신을 가진 신자」로 되어야 하는 때인 것 같습니다. 이 말은 「회개를 통해 개개인이 신자가 되는 단계」에서 「한 단체 공동체를 이루는 단계」로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볼 때 미래 한국교회 과제는 단지 몇 명을 입교시키느냐 하는 양적 성장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을 신앙안에서 어떻게 엮어내느냐 하는 「질」에 관한 것입니다. 앞으로 교회는 이 양자의 균형을 맞추는 작업과 그것을 결합시키는 데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양적 성장은 느려지겠지만 한국교회의 질적 성장은 날로 커질 것입니다.
-앞서 함께 세계화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한국 사회 역시 세계화 자본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아주 빠른 템포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물결이 사제들의 삶의 양식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요.
교회 스스로 먼저 복음화 돼야
▲제가 우려하는 바는 그 문제가 단지 사제들만의 문제가 아닌 교회 전체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물질주의가 점점 극심해지는 세상안에서 착실하고 성실하게, 또한 서민적으로 머무르는데 만족하고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유럽은 물론 북미에서도 교회가 스스로 세속화를 진행시켰습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교회 스스로 끊임없이 복음을 읽어야 합니다. 때문에 교황 바오로 6세는 「현대 교회의 복음선교」 회칙에서 『복음화는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 스스로에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자기 자신의 삶을 「복음」기준으로 평가해야 하는데 이는 전체 교회뿐만 아니라 평신도 사제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에 속하는 모든 이들, 즉 세례 받은 모든 이들의 원계약 입니다. 물론 사제들을 교회라는 단체 앞자리에 세워진 사람으로 본다면 이들에게는 공개적으로 그런 것들이 요구되어지고 그래서 그것이 사제들을 어렵게 만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속화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사제들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소명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제들이 세속적인 면을 끊지 않을 때 그 계약은 일반 사람들에게 더 분명하게 드러나 보이게 됩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실망하고 또 이로인해 교회활동은 지장을 받게 될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사목신학이 학문으로써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새로운 학문분야를 젊은 교회인 한국교회에 소개하고 정착시켜 나가야 할까요?
열린 마당 안에 교회를 현존시켜야
▲사목신학에 대한 질문은 비교적 간단합니다. 교회는 인간을 위하여,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문화와 복음의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일합니다. 이것은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바오로 6세께서 「현대의 복음선교」에서 말씀하셨듯,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문화와 복음의 괴리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를 든다면 어떻게 문화와 복음사이에 하나의 다리를 놓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우리 교회의 자체 조직에 있어서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 연결해 주는 다리를 놓을 수 있는 교회는 과연 어떤 삶의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습니까? 분명한 것은 교회의 모든 사회적 형태들이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공산주의는 교회를 사회로부터 내몰아 제의방 속으로 감금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기들 스스로 자신을 제의방 속으로 제한시켜버린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참 묘하게도 반대자들이 교회를 제의방 안에 가두어버리는가 하면, 반대로 자기 스스로 자신을 가두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교회는 제의방 안에서 뿐만 아니라 공개적이고 사회적으로 열린 삶의 광장에서도 자신을 현존시킬 수 있는 충분한 사회적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런 사실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 사목신학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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