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도미니코 수도회 영성 (1)
중세기 교회가 낳은 위대한 성인들 중의 한 분은 스페인에서 출생한 구즈만의 도미니코(1170?-1221)이다. 도미니코 수도회의 창설자인 그는 일찍이 오스마 주교좌의 의전 사제로 활동하였다. 그 단체는 사도행전 4장 32~33절(초대 교회의 공동생활)의 내용에 따라 개혁된 삶을 살았다. 그는 세 차례나 그 단체의 원장으로 선출되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디다쿠스 주교와 함께 북부 유럽을 여행하면서 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활동하고 소동을 일으키던 무리들을 보았다. 거기서 그는 그 당시 교회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들을 올바로 가르쳐 참 교회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그의 사명처럼 여겨졌다. 그리하여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명을 받아 프랑스 남부를 중심으로 이단들(알비파와 왈도파 특히 카타리파)에 대항하고 설교로써 그들의 잘못을 깨우쳐 본 교회로 돌아오게 하였다.
1207년경에는 몇 명의 동지와 함께 순회 탁발 설교가로 활동하였다. 그의 이상은 루가 복음 9장 1~6절, 10장 1~12절(열 두 제자의 파견)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의 이상은 오스마의 주교와 교황 사절들의 지지를 받았고 마지막에는 교황의 후원까지 받았다. 알비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미니코는 끝까지 그의 활동을 지속시켜 나갔다.
1206년 프루일에서 도미니코는 알비파에서 본교회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수용하는 여성들의 공동체를 세웠다. 이 공동체는 이후 도미니코의 설교를 위한 기초가 되었다. 수도회의 공식 명칭은 「설교자들의 수도회」(Ordo Praedicatorum 줄여서 O. P. )였다. 이를 공적으로 공포하는 선언문은 이렇게 되어 있다. 『알려져 있는 대로 우리 수도회는 처음부터 설교와 영혼 구원을 위해 설립되었으며 우리의 노력은 일차적으로 그리고 열정적으로 이웃 사람들의 영혼에 유익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은 거룩한 독서와 육체 노동을 대신하는 거룩한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고 이를 위하여 침묵을 강조하였으며 거룩한 진리에 대한 연구가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하여 간결하고 활기찬 성무일도를 창으로 바쳤다. 그들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규칙을 도입하고 프레몽트레의 전통을 엄격히 지키고 있었다. 이렇게 한 이유는 그 당시 새로운 수도회 설립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제4차 라테란 공의회의 13항을 엄격히 지키자는 데 있었다.
그 후 도미니코의 활동을 세 단계로 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수도회의 조직을 완성하여 수도자들을 툴루즈와 바리, 볼로냐, 마드리드 그리고 로마로 파견하는 것이었다. 파리의 신학대학과 볼로냐의 교회법 대학은 이 수도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탁발 수도회는 복음적 가르침과 동질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수도회 헌장을 보완하여 발전시켰다. 두 번째 단계는 그가 로마에 체류할 때 교황과 교황청은 그에게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므로 수도회 발전의 시기로 보여진다. 그는 사방으로 여행하면서 설교하였고 형제들을 격려하면서 공동체를 세워나갔다. 롬바르디아에 여섯, 프로방스에 넷, 프랑스에 넷, 토스카니아와 로마에 셋, 스페인에 아홉 개가 설립되었고 설교단은 영국, 독일, 헝가리, 스칸디나비아에 가서 일하였다. 도미니코는 여성들을 위한 공동체들도 설립하였다. 세 번째 단계는 그의 열성적인 사목 활동이다. 그는 설교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그는 동유럽의 야만인 쿠만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우고릴노 추기경과 더불어 북부 이탈리아에서 활동하였다. 이는 그가 알비파 이단에 대항하여 일할 때와 같은 것이었다. 그의 지나친 활동은 그의 죽음을 앞당기고 말았다.
그의 활동을 통해 그의 성덕을 볼 수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뛰어난 분이었다. 항구한 기도생활과 밤을 새워 기도하기도 한 그는 하느님의 사랑에 매혹된 수도자였다. 그는 감정이 풍부하여 기도할 때와 미사를 봉헌할 때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그의 극기 생활 또한 많은 이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중세기에는 극기생활이 강조되었다. 수도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으므로 그도 극기와 단식에 몰두하였다. 심지어 그는 맨땅에서 잠을 자기도 하였다. 그리고 형제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정은 예외적으로 놀라왔다. 사제로서 그는 교회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예리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독자적으로 활동하지 않았고 제도권과 일치하여 활동하였다. 이단자들을 대항하여 올바른 가르침을 민중에게 펼쳤고 그들을 올바른 신앙에로 돌아오게 하였다. 훌륭한 설교자가 되기 위하여 기도에 몰두하고 연구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묵상하고 연구하는 것은 그와 동료들의 중요한 일과였다. 그것은 기도한 바를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만든 수도회는 가난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이것은 복음의 정신을 사는 것으로서 사도들의 삶을 본받는 것이었다.
도미니코가 귀천하자 그의 무덤은 공경의 장소가 되었고 돌아간지 13년 후에 성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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