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가라지 비유와 그에 대한 해설을 들려준다. 그런데 가라지 비유를 읽어 가노라면 뭔가는 모르지만 조금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라지」라는 문제는 거의 반사적으로 없애야 할 무엇으로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기본적인 생각이요, 어쩌면 그것이 너무나 이치와 도리에 맞는 일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사는 곳은 강원도 횡성이라는 농촌 지역인데 이곳에 살다보면 잡초의 생명력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수녀원과 농촌 지역을 거닐다보면 가끔씩 농부들과 수녀님들이 일년에 몇번씩 풀을 베어 내기도 하고 뽑아 버리고 때로는 제초제를 치는 모습을 드물지 않게 보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잡초들은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 이곳 저곳에서 자라나게 된다. 만일 잡초를 한두달만 그대로 둔다면 아마 모든 밭은 잡초 밭으로 바뀔 것이다.
그러기에 초등학생 정도만 되어도 농사를 위해서는 「가라지」가 상징하는 「잡초」란 것들은 없애야 할 무엇으로 보는 것은 거의 상식 이전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인 가라지 비유에 나오는 집주인의 태도는 너무나 이상하다. 종들이 가라지를 뽑아버리겠다고 이야기를 하는데도 주인은 거부하는 것이다. 막말로 이야기하면 주인은 가라지를 뽑는다고 해도 손가락 하나 까닥일 필요없이 시원한 안방에서 낮잠을 즐기면 되는 상황인데도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거부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농사를 모르거나 망칠 생각이 아니라면 평범한 인간의 생각으로는 너무나 뜻밖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성서주석학자들에 따르면 바로 이 부분, 종들의 성실성에 대한 주인의 거부가 이 가라지 비유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거부를 통하여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 먼저 이 가라지 비유는 오늘날까지 미묘한 문제로 남아 있는 교회 안의 악인의 문제에 대한 대답이라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기에 이 비유는 먼저 교회란 선인과 악인이 함께 뒤섞여 사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가라지는 밀과 함께 추수 때까지 가지고 가야할 무엇이듯이 교회도 마지막 심판 때까지 악인들과 함께 갈 수밖에 없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깨달아야 할 점은 선인과 악인의 구분과 옳고 그름을 심판하는 것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리에 속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가라지를 태우는 것이 추수 때의 일이라면 우리 주위의 형제 자매들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유보하는 것도 또 하나의 신앙의 덕이 되는 행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주인의 대답을 통해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점은 종들이 해야할 기본적인 임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종들의 일은 밀을 가꾸는데 있다.
그러기에 종들의 1차적인 자세는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되겠느냐」라는 말에 포함되어 있는 밀에 대한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의 애정이지 「가라지를 뽑아 버릴까요」와 같은 부정적인 것에 대한 배타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라지 비유를 통해 필자가 가끔씩 생각해 보는 것은 이 비유는 결코 교회 안의 악인의 문제만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라지란 단순히 악인만을 상징하는 말이 아니라 「누구나 거부하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죄나 단점」 등, 부정적인 무엇을 상징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알아듣고 보면 이러한 가라지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만 발견되는 문제가 아니라, 나의 모습 안에서도 너무나 쉽게 발견될 수 있는 모습이요, 사랑스러운 나의 남편이나 아내, 그리고 나의 부모와 자녀들, 그리고 우리 이웃들 안에서 너무나 흔히 발견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가라지 비유는 교회 공동체와 우리, 그리고 나와 너의 가슴 안에 자라나는 정말로 받아들일 수 없고, 뽑아 버리고 싶고, 뽑아 버리면 시원할 것 같은 이 가라지에 대하여 뽑아 버리고 싶은 불가능한 욕구를 자제하라는 것이요, 나와 타인이 가지는 단점과 부정적인 면에 대하여 좀더 너그러운 마음과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는 요구가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이러한 가라지를 자기 합리화를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라지는 불가항력적인 것이긴 해도 심판 때까지만 유보된 한시적인 문제이기에 좋은 밀에 대한 애정으로 가라지와 밀을 구분하는 노력까지 면제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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