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가」의 창시자 묵자는 반전 박애 평화 평등이라는 묵가 집단의 이상을 전파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각국에 파견한다.
파견한 제자들은 묵자가 신임할 정도로 사상무장이 철저한 정예요원이었지만 그러나 이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의 신념」과 「대의」를 저버리게 된다. 그것의 가장 큰 이유는 봉록의 무게가 신념과 대의를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사상무장이 잘 되어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 따르는 단호한 실천이 없을 때 그 사상과 신념은 그리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은 여기에서 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신앙 안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겠다. 10년간의 사제 생활을 뒤돌아보면 사제로서의 길에 가장 강력한 유혹은 안정과 풍요 그리고 즐거움이 주는 맛에 대한 유혹이요, 이 맛에 길들여질 때 어떻게 자신의 신념과 신앙에 눈감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단언하지만 앞으로의 삶에서도 이러한 것들에 대한 단호함과 엄격한 거부가 없다면 「앎」과 「삶」의 이원화는 계속될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제자들이 가져야 될 3가지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라는 말씀을 통하여 제자됨의 근본이 순례자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보금자리를 가지고 휴식과 안식을 누리기를 희망한다.
이러한 욕구는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욕구이리라! 그러기에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보금자리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본능적인 욕구마저 포기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흘러가기에 제자들은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로 자리를 옮기셨던 예수님을 본받아야 될 것이며, 오직 하느님만이 제자들에게 주어질 유일한 휴식처가 될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질 안정과 평화는 미래에만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안정과 평화 대신 불안을 선택하는 삶이요, 나자렛에서 배척을 당하시고, 사마리아에도 들어 갈 수 없으셨던 것과 같은 냉대와 멸시를 각오하는 삶인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은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고 말씀하심으로 부르심의 절대성을 보여 주고 있다.
유다교 일각에서는 장례를 선행의 극치로 간주하였다. 그러기에 정결례 때문에 문상 가는 일을 꺼렸던 제관들조차 자기 부모나 동기 자식의 장례만은 손수 치러야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마저도 포기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는 다른 모든 요청은 포기돼야 한다는 부르심의 절대성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인륜지대사도 자식으로서의 기본적인 도리마저도 부르심 뒤로 돌릴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선교라고 하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기 위해서는 세속에 대한 모든 배려에서 자유로움을 유지해야 하고, 그 일을 위해 배타적인 절대성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선생님을 따르겠다. 그러나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해달라는 사람의 요구에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를 따름에는 어떠한 조건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1독서는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가 엘리사를 제자로 삼는 내용이다. 이 때 엘리야는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부모님께 대한 마지막 작별인사, 이것은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요 상식적인 일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마저도 금하신다.
이 사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언자의 길 이상의 단호함과 인간적인 상식의 초월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쟁기를 잡은 사람이 밭을 갈기 위해서는 앞만 보고 나가야 하듯 예수의 제자 된 사람들도 뒤를 돌아보기 위해 발을 멈추고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신앙인은 과거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에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됨의 절대성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철저함과 근본적인 결단이 있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이나 인간적인 감정, 그리고 우리가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을 상대화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삶의 윤택함과 편함을 위하여 하느님을 상대화시키고 하느님의 말씀과 신앙의 삶을 하나의 악세서리 정도로 생각하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너무나 날카로운 채찍으로 다가오는 교훈인 것이다.
말씀 안에서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