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장난끼와 어릴적 순수했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를 몇가지 더 소개한다.
복사를 하던 시절, 나는 신부님께서 식빵에 빨래비누처럼 생긴 것을 열심히 발라먹는 것을 보고 의아해했다. 먼발치서 바라보면 그것은 분명 빨래비누였다. 그게 뭔지 궁금하기도 하고 먹고싶기도 했지만 엄두도 못낼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집에 있는 식빵에다가 빨래비누를 열심히 발라 다 먹어치웠다. 그날 하루종일 복통과 설사로 죽을뻔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신부님께서 치즈를 바른 빵 한조각만 줬어도 그런 고생은 안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일제말기의 소신학교
48명이 소신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땐 사제지망생뿐 아니라 일반 교우가정 자녀들도 함께 입학했다. 따라서 신학교생활은 기숙사에서만 이루어졌고 공부는 그들과 함께 했다. 당시는 일제말기라 일본의 식민정책이 노골적으로 강화되던 시기였다. 신사참배는 말할 것도 없고 공부는 뒷전이고 거의 매일 근로봉사에 불려다녔다. 한마디로 강제노역이었다. 수원비행장과 부여의 신궁(神宮)터는 그때 우리가 닦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말기에 학창시절을 보낸 우리는 참 불행한 시절이었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먹을 것이 없어 참으로 배가 고팠던 시절이었다. 얼어 썩은 감자를 먹기 일쑤였다. 하도 배가 고파 한번은 이종흥 몬시뇰(대구대교구 은퇴)과 도토리를 찾아 먹었는데, 도토리 가루를 그냥 그대로 먹었더니 이몬시뇰은 변비에 걸려 입원까지 해야했고 나는 도토리 가루가 얼마나 독했던지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렸다.
소신학교 시절 웃지못할 에피소드 한가지. 하루는 잠자리에 든 임응승 신부 입에서 『달그락 달그락』하며 쩝쩝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남몰래 사탕을 먹는 것이 분명했다. 다음날 아침, 『야 응승아 너 사탕먹었지』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임신부 정색을 하며 『사탕없다』고 잡아뗀다. 『책상 뒤져서 사탕 나오면 다 먹는다』고 했더니 『좋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동기 한천수와 몰래 임신부 자리에서 캔디통을 발견한 우리는 쾌재를 부르며 한움큼씩 사탕을 집어냈다. 절반은 남겨두고 나머지는 사탕 크기만한 돌멩이를 집어넣었다.
그날밤 잠자리에 든 임응승 신부 입에선 돌멩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툇 툇』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예상은 적중했다. 이 모두가 먹을 것이 없고 배가 고픈 시절이었기에 생긴 웃지못할 일이었다.
징병을 피해
그렇게 소신학교를 마치고 대신학교에 진학한 나는 해방을 눈앞에 두고 예상치 못한 위기를 맞았다. 아마 45년 4, 5월경으로 기억된다. 그날이 목요일 산보날이라 모두들 나가고 나와 동기인 한천수(6.25때 선종) 두사람이 집을 지키고 있는데 일본 헌병대에서 징병 영장을 들고 왔다. 놀랍게도 그 대상은 바로 나와 한천수 두사람. 유봉운과 한천수를 찾는 헌병에게 『산보나가고 없다』고 둘러댄 우리는 잠깐동안이었지만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할 것인가. 징병에 응할 것인가, 아니면 피신할 것인가. 후자를 택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급한 마음에 당시 혜화동 신자이던 나쯔야마씨(조문한 장군의 부친)에게만 이 사실을 알리고 한천수와 나는 토성을 거쳐 해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안도 안전하지 못했다. 우리처럼 징병을 피해 숨어 다니는 젊은이들을 잡으려는 헌병의 감시가 삼엄했다. 한천수와 나는 인절미를 팔러 가는 아낙네들에게 사정을 말하고는 그들이 앉은 의자 밑에 몸을 숨겼다.
밤중에 해주에 도착한 우리는 성당을 찾았다. 식관을 통해 라틴어로 다급한 사정을 알리는 메모를 사제관에 전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더욱 기가 막혔다. 『이곳 성당이 일본 헌병본부로 사용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해주에서 옹진방향으로 15㎞ 떨어진 00공소로 가라』(공소이름은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내용과 『철길을 따라 갈 것』과 『밤에 하얗게 보이는 것은 물이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한천수와 나는 발길을 재촉했다. 철교를 건너던 우리는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열차를 발견했다. 『이대로 죽는구나』.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 한천수와 나는 다리 난간을 꽉 붙잡고선 눈을 감았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살아있음을 확인한 우리는 다시 철교를 만나면 다리 밑으로 수영을 해서 건넜다.
다음날 새벽 공소에 도착한 우리는 해주에서 알려준대로 최회장을 찾았다. 그들은 공동묘지가 가장 안전하다며 우리가 그곳에서 지낼 것을 제안했다. 나와 한천수는 이장(移葬)한 뒤 패인 구덩이에 몸을 숨기고 생활했다. 공소 신자들은 장례나 삼우제 등을 이용해 음식을 날라다 주었다.
그곳에서 나는 해주의 일본군 탄약창을 폭격하는 연합군의 B29 폭격기를 목격하기도 했다. 밤에 요란스럽게 들리는 늑대 울음소리가 귀에 거슬렸을뿐 우리는 수개월을 그곳에서 숨어지내다가 8월 15일 해방을 맞았다.
그때 징병에 끌려갔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는 일제말기라 전장의 상황이 워낙 좋지 않을 때였다. 망설임 끝에 피신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피신중에도 숱한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해방을 맞은 것은 모두가 하느님의 은혜로운 보살핌과 성모님의 도우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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