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린 시절의 아픈 추억을 되새기는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인생 어느 일부분에만 역사하시지 않고 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 하셨다는 믿음이 그 하나이다. 돌날 발병한 화농성 관절염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고통과 멍에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요, 하느님 영광을 드러내는 시발점이었기에 그렇다. 다른 하나는, 내 인생이나 문학에 있어서 특히 유소년기의 체험은 모든 것들의 원인이 되었다는 또 하나의 믿음 때문이다. 이를테면, 내가 그때 병에 걸리거나 장애인이 안 되었다면 어찌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건강하게 자랐다면 오늘날 전혀 다른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을 것 아닌가? 그러기에 나는 지난 날 슬픔이 눈시울을 뜨겁게 할지라고 어렸을 적 일들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러나 되돌아보건대 내 생애에 있어서 어린 시절은 역시 한정된 것이었다. 더 많은 세월이 나를 기다리고, 그 세월 속에 나의 육신을 마구 녹여내는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목포중학교에 합격한 다음에 발생했다. 당시는 중학교 입학 시험을 치르던 때였다. 그래서 명문으로 알려진 목포중학교에 가기 위해 멀리 떨어진 친구 집에서 여럿이 합숙하며 입시 준비를 하였다. 한겨울에 냉방에서 몇 개월간 공부한 덕분에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는데, 그러나 입학식을 마친 날 갓난아기 때 수술했던 부위에서 통증을 느꼈다. 이 통증은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것이었다. 이후 환부에 염증이 몰려오면서 끊임없이 에리고 쑤셨다. 그리고 나중에는 한속이 들더니 급기야 우유 빛깔로 화농이 되었다. 나는 동네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이로써 고통이 가셨으나 환부에서는 계속 고름이 흘러나왔다. 간호원 출신인 새어머님이 매일 치료해 주고 주사를 놔 주었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하자, 새어머님은 목포에서 가장 큰 골롬반 병원에 나를 데려갔다. 진찰을 마친 의사는 내가 병원에 입원해 3년간 깁스를 한 채 치료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 3년이라는 기한이 내 발목을 잡았다. 한창 공부해야 할 나이에 너무 길게 느껴졌다. 게다가 체신 공무원인 아버님의 봉급으로는 장기간 병원비를 감당하기가 벅찼다. 그래서 민간 요법으로 치료받기로 하고 화농성 관절염을 많이 고쳤다는 노인으로 하여금 치료하게 하였다. 독성이 강한 가루약을 심지에 말아 환부에 집어 넣는 방법인데, 생지옥이 따로 없다 싶을 정도로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나는 근 반년에 걸쳐 고생한 끝에 치유되었다.
이렇게 집에서 투병중일 때 나는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일대 사건을 맞았다. 중학교 2학년 담임이신 영어 선생님과 국어 선생님, 그리고 수학 선생님이 나의 집을 방문하였던 것이다. 이날 선생님들은 나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였다. 『광호, 너는 좌절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는 너보다 훨씬 불편한 몸을 가졌으면서도 인간 승리를 이룬 분들이 적지 않다. 헬렌 켈러를 보아라. 눈이 멀어 사물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말하거나 듣지도 못하는 3중고 속에서 수개 국어에 능통하고 세계 평화와 복지 사업에 공헌하지 않았느냐? 또 베에토벤은 실명한 가운데서도 훌륭한 작곡가로 이름을 날렸고,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다리를 절면서도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정치가가 되었다. 광호, 너는 문학에 재능이 있다. 우리 나라에는 아직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가 없는데, 네가 열심히 노력하여 노벨 문학상을 받아라. 너는 할 수 있다』 이 말씀은 나의 가슴을 울렁이게 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병석에 있는 어린 제자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다분히 교육적인 말이었지만, 그 당시 내가 받아들인 파장은 원자폭탄과 같은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네가 열심히 하여 노벨 문학상을 받아라. 너는 할 수 있다』는 말이 폐부를 찔렀다. 『그래! 나는 할 수 있다. 내가 노벨 문학상을 타자!』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노벨 문학상이 얼마나 대단한 상이라는 건 안중에 없었다. 다만 선생님들이 나를 인정한만큼 노벨 문학상에 목표를 두고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각오를 하였다. 이 각오는 학교를 다니는 동안 계속되었고, 내 능력이 노벨 문학상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20대 중반에도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 불씨는 40여 년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문학을 하는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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