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혜화동 신학교로 복귀했지만, 1년 사이에 학제(學制)가 두 번이나 바뀌는 등 학교도 사회분위기 만큼이나 어수선했다. 나는 49년 11월 부제품을 받았다.
이듬해 6월 25일 새벽. 『쿵~쿵』하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천둥소리려니 했지만 38선을 넘어온 북한군의 포탄소리였다. 하룻만인 26일 북한군 탱크는 미아리까지 진격해왔다. 남산쪽에 떨어지는 포탄의 섬광을 또렷이 목격할 수 있었다.
학장신부는 교내에 모셔진 성체를 피신시켰다. 신부들과 신학생들은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27일 명동에 나간 나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날 밤 남산을 넘어 용산신학교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한강철교가 우리 국군에 의해 폭파되는 현장을 똑똑히 지켜봤다. 라이트를 켠채 철교를 건너던 자동차들이 줄줄이 한강으로 곤두박질쳤고, 주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훗날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 장면들이 바로 눈앞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기도서만 들고 피란길에 28일 새벽, 기관총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나는 피란을 결심하고 마포나루에서 쪽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군포-시흥을 거쳐 고모부가 공소회장으로 있던 병점에서 하루를 묵었다.
다음날은 천안에서 하루를 지내고 『어차피 피란길에 오른 것 부산까지 갈 작정』을 하고 대전으로 향했다. 다시 논산을 거쳐 전주에 도착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라도 지역은 계엄령이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피난민들이 이곳에 모였다. 나는 전주에서 다시 수류리 공소로 갔다. 공소엔 피난온 신부들이 여럿 있었다. 그곳에서 3년 후배인 김창렬 신학생(현 제주교구장)을 만났다. 이틀을 묵은 뒤 김창렬 주교는 『이왕 나선 길 부산까지 가겠다』는 나와 동행하겠다며 따라나섰다.
김주교와 나는 정읍-장성-광주-순천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진주 남강 상류지역에 다다랐다. 강을 건너야겠는데 가진 돈은 한푼도 없었다. 마침 강을 건너고 난 뒤 품삯을 치른다고 하니 일단 배에 오르고 볼일이었다. 강을 건너간 뒤 『서울서 피난온 학생들』이라며 『좀 봐달라』고 사정했다. 함께 강을 건너온 이들이 『봐주라』며 거들어 위기는 넘겼다.
한데 얼마 가지 않아 또 나루가 나타났다. 이곳에선 미리 삯을 내야 탈 수 있다고 했다. 통사정을 해봐도 들어주질 않았다. 김주교와 나는 궁리 끝에 목만 내놓고 몸은 물속에 담근채 뱃머리를 잡고 매달렸다.
뱃사공이 기가 막혀 『삯을 내라』고 소리쳤지만 우리는 『이게 배를 탄거요? 우린 그냥 배에 매달린 것 뿐이요』하며 맞고함을 쳤다.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배짱이 생겼는지 우스운 생각이 든다.
한번을 더 이런 방법으로 강을 건너서 진주에 도착했다. 진주성당(아마 지금의 옥봉성당이라고 기억된다)에서 본당신부인 선배 이철희 신부를 만났다. 이신부가 국수를 삶아 가져왔는데 김주교와 나는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두그릇씩 비웠다.
이철희 신부의 권고대로 우리는 30리길을 걸어 문산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도 피난온 여러명의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문산에서 이틀을 쉰 우리는 열차로 마산과 삼랑진을 거쳐 8월 5일 부산진역에 도착했다. 6월 28일 피란 기간이 그리 길지 않을거라 생각하고 성무일도서만 달랑 들고 신학교를 나선 나는 꼬박 39일만에 피란길의 종착지인 부산에 도착한 것이다.
서울서 피난온 신학생들은 부산 중앙성당에 모여 지냈다. 부제를 포함해 20여명이 있었다. 이들은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하자』는데 뜻을 모으고 국군병원으로 사용되던 토성국민학교와 영도지역 국군후송병원에서 사도예절을 거행하거나 세례를 주고, 생존자들의 편지를 대필해주고 사망자 분류작업 등의 일을 도왔다.
당시 신부들은 미사를 집전해주고 받은 약간의 예물로 매끼니마다 나오는 보리죽 대신 외식을 할 수 있었지만 신학생들은 싫어도 보리죽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당시 경향신문사 사장이었던 김철규 신부를 부산에서 만나 사정을 얘기했다. 『신학생들이 보리죽만 먹으니 언제 쓰러질지 모를 일입니다. 신학생들 영양보충 좀 하게 돈좀 주십시오』하고.
김신부는 흔쾌히 돈을 줬고 우리는 그 돈으로 국제시장에서 도너츠랑 사이다, 동동주를 사다가 실컷 먹었었다.
9·28 서울 수복후 당시 부산에 있던 7~8명의 부제들은 대구로 가서 한달 가까이 함께 지내며 수학했다. 사제품을 위해서였다. 그해 10월 28일 나와 제찬규, 이갑수, 신균식 등 4명의 부제가 대구 최덕홍 주교의 집전으로 계산동 주교좌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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