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목포고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 다시 환부에 통증이 찾아왔다. 그리고 중학교 1학년 때 겪었던 그 고통의 늪에 빠져들었다. 그 동안 완쾌된 줄로 알았는데, 화농성 관절염이 재발한 것이다. 부랴부랴 나를 치료해 주었던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분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고, 비방을 전수했다는 아들에게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나는 매일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그러나 이 비방으로 나았기 때문에 어떤 고통도 견디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1개월이 가고 2개월이 갔지만 이번에는 병세가 호전되지 않았다. 병상에서 2학년을 맞았으나 상태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그 해 봄에는 걷잡을 수 없이 고름을 쏟아내며 탈진 상태에 이르렀다. 문병차 들른 친척들은 내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5월 21일 병원으로 옮겨져 대수술을 받고서야 살아났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하기 전 나는 본교에서 실시한 문학상 소설 부문에 응모했다. 병고 속에서 정성을 기울인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예선을 통과하여 소설가 박화성 선생님께 최종심이 맡겨졌다. 나는 병원에서 낙선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후배가 가져온 교지에서 최종심 심사평을 읽게 되었다. 거기에는 내 작품에 관한 것도 있었다. 『이 학생은 책을 많이 읽은 듯하나 구성이 산만하고 문장에 과장법이 심하다…』. 대개 이런 내용과 사례가 열거되어 있었다. 순간 나는 심한 자괴감에 빠졌다. 여태까지 쏟았던 소설에 대한 열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래서 교지를 내던지며 『난 앞으로 소설을 쓰지 않을 거야!』하고 단언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의 신앙과 문학을 동일 선상에 두기 때문이다. 이제 곧 갖게 되는 천주교 신앙은 자연스럽게 문학에 접목하게 되고, 급기야 하느님께 문학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겠다는 약속을 할 것이다. 따라서 일찍이 학교 선생님들의 「노벨 문학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격려 이후 내가 가졌던 포부와 열성은 단순한 삶의 한 수단이 아니요, 앞으로 하느님의 영이 호흡하는 문학으로 승화해 가는 과정이었다. 그러한 까닭에 당시 소설을 포기하기로 한 건 나에게 작은 사건이 아니다. 그러나 이 일은 오히려 나에게 보약이 되었다. 그 내막은 다음 기회에 밝히겠다.
100일간 입원해 있다가 퇴원한 나는 집에서 계속 치료를 받았다. 새어머니는 매일 치료해 주고 주사를 놔 주었다. 처음에 어머니라는 말을 입밖에 내지 못하던 나는 새어머니의 헌신적인 간병에 감복하여 스스럼없이 어머니로 받아들였다. 그러함에도 내 가슴속에 자리한 생모를 대신할 정도는 아니었다. 늘 혼자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고,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며 자신에게 묻곤 하였다. 그런데 이때 아주 이채로운 분이 나의 위로자로 나타났다. 바로 목포 경동 성당에 소임중인 할머니 수녀님이었다. 수녀님은 일주일에 한두 번씩 방문하여 갖가지 말로써 위로와 용기를 불어넣었다. 어느때는 영성 서적을 빌려 주기도 하였다. 초등학교 5∼6학년 때 친구를 따라 성결교회를 다닌 적이 있기에,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생소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사랑해 주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감수하셨다는 말이 의기소침해 있는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더욱이 수녀님의 인자함이 나의 빈 가슴을 따스하게 채워 주었다.
이 무렵 나를 자주 찾아 주는 분들이 또 있었다. 작은아버지와 이모였다. 이분들은 모두 천주교 신자였고, 특히 작은아버지는 목포 지구 꾸리아 단장으로서 아주 열심히 활동하는 분이었다. 나를 문병할 때마다 입교를 권면하고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작은아버지가 놀라운 사실을 알려 주었다. 내 생모가 돌아가시기 전에 자신이 대세를 주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어머니의 구령을 위해서라도 내가 입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세의 의미를 알게 된 나는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하물며, 아들의 기도가 부족해 어머니가 연옥에 계신다면 얼마나 불효인가 싶었다. 이미 하느님과 성모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있던 나는 마침내 정식으로 교리를 배우기로 하였다. 그러자 할머니 수녀님께서 기꺼이 방문 교리 지도를 해주었다. 이후 320조목의 「천주교 요리문답」을 외우는 게 새로운 일과가 되었고, 그것은 차츰 신앙에 눈을 뜨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하여 1963년 12월 23일 영세의 특은을 입었다. 이날 나는 육신의 건강을 간절히 청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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