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수품될 당시 대전교구는 17개 본당이 있었고 한국인 신부 1명 외에는 모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들이 사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6·25 전란 와중에 모두 납치되거나 피살돼 충청도 지역에는 사목자가 전무한 상황이었다.
10월 28일 수품된 나는 대구 계산동성당과 대구에 있던 「혜성병원」에서 첫미사를 집전하고 곧바로 임지인 서산, 당진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고향인 공주에 들러 하루를 쉬고 꼬박 3일을 걸어 서산에 도착했다.
순탄치 않았던 초기생활 서산에서 13개월을 사목한 뒤 51년 12월, 논산본당 보좌로 발령을 받았고 이듬해 9월 대흥동본당 보좌로 부임해 1년간 사목했다. 그리 길지않은 기간동안 몇차례 사목지를 옮긴 것은 아마도 당시 교구장이었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원주교님(프랑스인)과 본당신부였던 프랑스인 신부들과의 갈등이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논산에 있을때의 일화다.
하루는 본당신부가 『관할 공소에 급한 일이 생겼으니 내일 아침을 먹고 갔다 오라』고 했다. 그러면서 『프랑스 속담에 자전거와 만년필, 시계는 절대 남에게 빌려주는 것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다음 날 미사를 드린 후 급한 마음에 아침도 먹지 않고 성당을 나섰다. 영문도 모른채 약도 한 장 달랑 들고 나섰지만 공소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겨울이어서 길은 눈에 덮혀 분간이 되지 않았고, 그때만 해도 성체를 모시면 말을 하지않는 규율을 엄격히 지키던 때라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한참을 헤매던중에 지나던 사람 몇몇이 수단을 입은 내 차림새를 보고는 『신부님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더니 『신부님 이제 오시면 어떡하냐』며 안타까워했다. 사연인즉 종부성사를 기다리던 신자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눈물이 핑 돌았다. 성당에 돌아와서 본당신부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본당신부도 놀랐는지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나는 그래도 분이 삭질않아 『프랑스 격언이 하느님의 계명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인가』고 따졌다. 본당신부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내심 나의 존재를 껄끄러워하기 시작했다.
한번은 논산 대건고등학교에서 교리를 가르칠때의 일이다. 수단을 벗어놓고 학생들과 축구를 하고 있었는데 본당신부가 그 모습을 보고는 『유봉운 선생』이라고 불렀다. 『왜 그렇게 부르느냐』고 물었더니 『수단을 입지않았는데 어떻게 신부인가』하고 말했다.
나는 이렇게 반문했다. 『신부님은 잠잘 때 수단을 입고 잡니까. 수단을 입지 않는다면 그 순간은 신부가 아닙니다』. 또 『목욕할 때 수단을 입고 하십니까. 아니라면 그때도 신부가 아닙니다. 수단은 신부임을 나타내는 외적 표시일뿐이지 수단이 신품을 받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내가 겪은 일이기 때문에 일반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이 자리를 빌어 프랑스인 선교사제들의 잘못을 지적할 의도는 추호도 없다.
다만 내가 겪은 바로는 그들의 지배하고자 하는 모습, 선교지역인 한국과 한국인, 한국인 신자들을 무시하는 태도, 투명치 못한 모습들이 안타까웠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가끔 『선교사로서 고향과 가족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선교사제들이 봉사하고 희생하는 모습 보다는 왜 저러한 모습을 보일까』하는 실망감을 지울 수 없었다. 부산 피란시절에는 허락없이 미사경본을 사용했다고 미사도중에 경본을 뺏어가는 일도 있었다.
대흥동을 떠나 장항. 대천본당 주임으로 5년 가까운 기간동안 사목했다. 그러나 결국엔 「요주의 인물」로 찍힌 나와 프랑스인 선교사제들과의 갈등 때문에 58년 4월 부산교구 구포본당신부로 발령받아 가게 됐다. 『한국인 주교와 한국인 본당신부 밑에서 살고 싶다』는 나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부산에서의 사목활동은 2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60년 3월 귀환명령을 받고 성환본당 신부로 부임했다. 당시 성환본당은 공소에서 막 본당으로 승격된 곳으로 먹고 살기 힘들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다. 나는 인근 미군 탄약창에서 미사를 집전해주고 받은 약간의 사례비와 동창들의 도움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러다 64년 12월 한국 군종신부단 부단장으로 부임했으나 이듬해 5월 31일 대전교구 관리국장으로 전격 임명됐다. 그 배경엔 65년 3월 대전교구장 주교에 임명된 황민성 주교(당시 명동본당 신부)의 끈질긴 요청이 있었다. 동기였던 황주교는 거듭되는 나의 고사에도 불구하고 주교서품일인 5월 31일에 맞춰 나를 대전교구 관리국장에 임명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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