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를 받던 날, 나는 뜻밖의 일을 당했다. 내가 영세 기념 사진을 찍고 성당을 나서는데, 한 젊은 자매가 달려왔다. 이 자매는 나에게 축하 인사를 보내고 성모님이 그려진 팸플릿을 내밀면서 말했다. 『형제님! 이 기도문을 매일 바쳐 주시겠어요?』 『아, 예! 그러지요.』 나는 엉겁결에 종이를 받았다. 『이것은 매일 한 번씩 바치는데요, 계속 바치면 형제님께서 은총 받으십니다….』 예쁘게 생긴 자매는 이 밖에도 여러 말을 하였지만 내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부탁을 받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고, 더욱이 묘령의 여인으로부터 기도 요청을 받을 줄이야! 집에 와서 찬찬히 들여다보니 레지오의 기도문이었다. 나로선 처음 들어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기도를 바치면 나에게 좋다고 하였기에 그 날부터 기도문을 바치기 시작했다. 이 작은 팸플릿이 뗏세라요, 내가 레지오 마리애 협조단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며칠 뒤에 찾아온 그 자매의 설명을 듣고 난 다음이었다. 나는 한참 세월이 지난 후에야 손뼉을 쳤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먼저 나를 레지오 협조단원으로 부르셨던 것이다! 그 이듬해인 1964년 1월 11일에는 서울 메디컬 센터(지금의 국립의료원)에서 치료받기 위해 서울에 올라갔다. 내가 연전에 이 병원 원장에게 「수술대 위에서 죽어도 좋으니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한 젊은이를 살려 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보냈던바 상경하라는 회신이 왔던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한 가닥 희망이었다. 당시 나는 치료를 포기한 채 거의 방치 상태에 있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듯이, 내 병이 장기화하자 가족들의 관심이 식어지고, 또한 시판되는 약들은 내성이 생겨 효력이 없었다. 그러한 때에 메디컬 센터에 탄원서를 보낸 것은 스칸디나비아 3국에서 보내오는 약품이 좋고 의술이 빼어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이 병원에서 거짓말 같은 효과를 보았다. 그 곳에서 주는 약을 쓴 지 3개월 만에 고름이 그치고 환부가 아물었다. 걸음걸이가 가벼운 것은 말할 나위 없었다. 병원에서는 수술을 각오했던 나에게 완쾌되었다고 말했다. 참으로 꿈만 같았다. 그렇지만 나의 기쁨은 7개월 만에 깨지고 말았다. 다시 발병했던 것이다.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건강이 회복됐다고 확신한 나는 경제적으로 자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붐을 일으킨 앙고라 토끼 사육을 결심했다. 아버지가 반대했지만 기어이 관철하여 서울에서 앙고라 종토 다섯 쌍을 구입해 백색 재래종 토끼들과 함께 길렀다. 이때 계획은 목포 집에서 토끼를 기르고 이듬해 봄 시골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사육하는 한편 문학에 전념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토끼 사육이 수월하지 않았다. 가장 큰 애로가 사료였다. 앙고라 토끼는 털을 필요로 하는 고급종이므로 사료에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매일 새벽에 비지를 사다 먹였으며, 자전거를 타고 변두리까지 가서 서너 시간씩 아카시아 잎사귀와 쑥 들을 채취해 돌아왔다. 그리고 차를 대절하여 월동용 사료인 고구마순을 시골에서 가져왔으며, 또한 싸이로와 엔실레지를 이용했다. 이런 일들을 혼자서 하다 보니 과로가 되었고, 급기야 다시금 환부에 통증이 찾아왔던 것이다. 이 때가 그 해 11월경이었다. 앙고라 토끼 사육으로 성공하겠다고 벼르던 나로선 낭패였다. 「이 노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고민 끝에 이 사실을 숨기기로 하였다. 다음해 시골에 가기만 하면 혼자 치료하면서 토끼를 사육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만큼 앙고라 토끼에 대한 애착이 컸다.
나는 끙끙 앓으면서 토끼들을 돌보았다. 가족들과 식사할 때는 눈치채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했다. 그러는 가운데 환부가 화농되자, 그 곳을 가위로 찔러 고름을 빼냈다. 고통이 덜어지니 살 것 같았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하였다. 매일 고름으로 범벅이 된 탈지면을 갈던 중 어느 날 새어머니에게 발각되었다. 이로써 나의 자활 의지는 물거품이 되었다. 토끼들을 모두 처분한 나는 다시 메디컬 센터에 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약이 효력을 내지 않았다. 지난번 투약으로 인해 병에 대한 내성이 생긴 것이다. 또 고름이 계속 흐르므로 수술도 할 수 없었다. 『우리 나라에 나와 있는 약으로는 방법이 없어요. 그러한즉 더 오지 마시오.』담당 의사의 이 말은 나에게 사형 선고와 같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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