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5일은 농민주일이다. 농업과 농촌의 위기를 우리 모두의 위기로 깨닫고 농촌살리기에 함께 나서기 위해 지난 1995년 제정돼 올해로 6회째를 맞고 있는 농민주일은 곧 세계화의 풍파에 맞선 농민 형제들의 아픔의 현재를 더듬고 그들의 아픔을 나누는 장이기도 하다. 농민을 살리는 작은 노력에 동참하는 뜻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농촌교구인 안동교구를 중심으로 농촌의 현실과 농민들의 애환을 담았다.
한국교회에서 전형적인 농촌교구로 손꼽히는 안동교구. 지난 1969년 교구로 설정돼 장년의 전성기에 들어섰어야 할 안동교구의 고민은 그러나 그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달라진 게 있다면 150여개가 넘던 공소가 그 반인 80여개로 줄었다는 사실뿐. 60년대 우리나라의 인구 가운데 30%를 상회하던 농업인구가 8.7%(403만, 2000년 현재)까지 떨어진 현실을 고스란히 인내하고 있는 안동교구의 모습은 불어난 농가 부채만큼이나 불안한 모습이다.
안동교구가 거쳐온 지난 30여년은 농촌교구가 안고 있는 문제의식을, 그리고 사회의 주된 생산자에서 언저리로 밀려난 농민들의 고된 삶을 담고 있다. 교구 설정 당시 초대 교구장 두봉 주교의 취임사에 담긴 「다같이 손을 잡고 구원의 길을 걸어가야」한다는 제안은 이제 그 손을 잡을 이마저 주위에서 점점 찾기 힘든 상황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도시와 농촌이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에서 농민뿐 아니라 도시 신자들의 의식 개발운동을 펼쳐온 안동교구의 몸부림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 열매를 바라보기 힘든 실정이다. 전통적 마을 공동체의 붕괴라는 현실 앞에서 공소 공동체의 해체에 속수무책인 것이다.
이런 현실에 맞서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회장=최병수, 지도=안상기 신부)는 지난 78년 설립 이래 농촌 협동 공동경작, 유기농법, 자연건강운동, 농촌 공소실태 조사, 씨감자 피해보상운동, 고추생산비 보장운동, 외국농축산물 도입 반대운동, 공소별 공동체운동 등 다양한 운동을 전개하며 추락하는 농촌을 붙들려 노력해왔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은 자본의 논리가 득세하는 현실을 이겨내지 못했다.
『지금 이대로라면 농민이나 농업이나 모두 끝장 났는데 그걸 모르는 것 같아 답답할 뿐입니다』
농촌을 지키며 10여년 넘게 농민운동에 매달려온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총무 강성중(이시돌·43)씨의 진단은 어쩌면 솔직한 지도 모른다. 강 총무는 현재의 사회와 교회 구조로는 농촌공동체를 살릴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간 농촌에서 펼쳐온 운동이 한계상황에 부닥쳐 있는 것이다. 이런 한계상황은 농촌에 대한 피상적 인식에서 비롯되고 있다. 이런 인식에서 출발한 운동이 농촌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는데 문제점을 드러내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런 이유로 농촌 관계자나 사목자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입장 차이가 노정되기도 한다.
안동교구의 한 사목자는 『현재 안동교구가 겪고 있는 전통 부락의 해체와 농민의 도시 유입은 거스르기 힘든 대세』라면서도 『신자수는 줄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이에 대해 한 농민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농민문제가 풀려간다면 미국처럼 2%의 농민이 98%의 소비자를 책임져야 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 멀지 않을 것』이라며 『이럴 경우 환경농업은 요원하며 농업을 지배하는 거대자본에 농민의 삶과 소비자들의 식탁을 맡겨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농민의 고령화도 농촌공동체 건설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안동교구가 70년대 이후 농촌의 중추가 될 청년층의 육성과 지도자 양성 등 인재 양성에 기울여왔던 노력은 이런 현실을 극복하려는 몸짓의 일환이었다.
교육 문화 정책 지원 시급
가톨릭농민회 안상기 신부는 『인구의 고령화로 공동체의 인적 재생적 구조 자체가 문제에 봉착해 있다』며 『국가가 정책적 차원에서 교육, 문화분야 등을 지원하지 않으면 농업 자체가 고사할 것』이라며 정부의 농업 유인책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안 신부는 『도시와 농촌에서 나름의 공동체를 이뤄 유기적 관계성을 일궈내고 삶의 관계성을 회복할 때 신앙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을 것이며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런 현실에서 지난 1990년대부터 「공동체 지원 농업(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이 활기를 띠고 있는 미국사회가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1980년대 후반부터 미국 전역에서 자생적으로 나타난 풀뿌리 공동체라 할 「공동체 지원 농업」은 농민과 소비자가 서로 협동하며 건강한 먹거리를 나누는 공동체로 현재 1000여개가 활동하고 있다. 농산물의 천국인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움직임은 유전자조작농업(GMO)이 지속가능한 생물학적 다양성을 박탈하고 매년 약 650만명을 식생활로 인한 질병에 시달리게 하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있다.
주목받는 쌍호공동체
이런 가운데 실험적 모색을 통해 농촌문제 해법의 모범을 만들어내고 있는 공동체가 있어 눈길을 끈다. 서울 목동본당을 비롯한 부산과 대구의 본당들과 수년째 교류하고 있는 경북 의성 쌍호공동체(대표=김종원)는 농촌사회의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공동체에서 생산되는 참기름과 들기름, 채소 등 농작물을 정기적으로 본당의 도시소비자들에게 공급하고 정례적인 「도농 생활나눔」까지 이어오고 있는 모습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농촌을 지키려는 이유를 들려준다. 이들의 모색은 20여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가구 안팎의 공동체가 공동출자를 통해 생산기반을 마련하고 유기농운동을 통해 생명사상을 곳곳에 뿌려왔다.
쌍호공동체 우영식(가브리엘·64·안계본당)씨는 농업의 소멸이 곧 도시의 죽음이라고 밝힌다. 그래서 그는 생명운동은 생산자가 할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더욱 나서서 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자신만 살려고 하면 농민은 죽지 않습니다. 함께 살기 위해, 하느님 창조사업의 보람을 나누기 위해 농촌을 살리고 땅을 살리자는 것이지요』
협동조합식 연대운동
안동교구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조창래 신부는 『건강한 먹거리를 매개로 한 도시·농촌공동체간 교류가 지금보다 전면적으로 확대될 때 창조질서 보전이라는 생명공동체 운동이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라며 『협동조합 등을 통해 서로 연대하고 협력해야 할 것』이라며 협동조합식의 도·농 연대운동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런 가운데 안동가톨릭농민회가 추진하고 있는 「생명의 터 우리농 마을 만들기」는 희망 찾기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간의 「생태마을 만들기」류의 계획들이 외부 전문가들에 의해 주도된 일방적인 계획이었다면 「우리농 마을 만들기」는 농민들의 자조·자립적인 마을로 추진되고 있다.
우리농 마을이 마을 단위의 유기순환적 농업 체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과 동시에, 도시의 소비자들은 이 마을의 안정적인 재생산을 위해 소비공동체를 이뤄 상호유기적 관계를 구축해 나간다는 것이다. 또 도시소비자들이 농장을 방문해 직접 농장체험을 통해서 땅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협동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깨닫도록 하겠다는 구상이다. 이 계획은 그러나 농민만의 한 축으로는 불가능하다. 소비자축이 건강하게 형성되지 않고서는 실패가 보이는 운동이다.
이 운동을 벌여 나갈 이들의 고민도 적지 않다. 도시인들의 의식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개인주의적 시각은 여전히 유기농산물을 「경제적 가치」로만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간의 다양한 모색의 실패도 이런 인식의 전환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성의 관계로 엮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제적 논리로만 농촌을 바라본 결과 미국사회가 겪는 진퇴양난의 상황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스스로 생산한 농산물을 앞에 두고 불안에 떠는, 그래서 더 안전한 생산지를 찾아 헤매는 모습은 창조주께서 마련하신 법칙에 따라 동식물의 생명을 토대로 창조사업에 동참해가는 농업의 소중함을 들려준다.
『농촌이 쓰러지면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는 중요한 보고를 잃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창조사업을 향한 농촌 현장에서의 애끓는 기원이 모든 이들에게 울림을 던져주길 농민들은 바라고 있다. 그리고 오늘도 그들은 그 바람이 생명의 공동체를 일궈갈 수 있는 하나된 힘으로 자라나길 소망하며 척박한 농토에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 경북 예천 김종삼씨
“농민은 사라질 존재 농촌에 희망은 없어”
『농민은 끝내 사라질 사람들 아닙니까. 30대가 단 한명도 없는 농촌에서 누구라고 희망을 찾겠습니까』
경북 예천에서 4대째 농사를 지어오고 있는 김종삼(요아킴·69·안동 구담본당)씨가 짙은 탄식과 함께 뱉어낸 말마디에서는 오늘의 농촌이 지고 있는 아픔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 바쁜 들녘의 일손을 접고 들어온 늦은 저녁, 공소 식구들과 사랑방에 모여 앉은 그의 탄식은 이어진다.
『아무도 우리 농민은 안중에 없는 것 같습니다. 같은 나라 국민인데 언제부터인가 농민은 바라기만 하는 사람, 그래서 뭔가 모자라는 사람들로만 여겨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천 구담본당 산하 열 개 지역공동체가 안고 있는 고민은 대체로 김씨의 그것과 비슷하다. 들녘에서 젊은이를 본 게 20년도 넘었다는 사목회장 류위형(요아킴·62)씨. 젊을 때만 하더라도 농촌을 바꿔보겠다는 열정에 팔을 걷고 나서기도 했던 그는 나이를 먹으면서 후손들의 기억에서조차 지워질 자신들의 존재가 서글퍼지기까지 한다.
『살기 위해 연고도 없는 객지로 나가는 사람들에게 남아 있으라고 붙들 순 없잖습니까. 오죽 답답했으면 수 대째 내려오는 고향을…』
▣ 강원도 양구 한명희씨
“대학 졸업후 시집와빚만 1억 넘어 불안”
대학 졸업 후 남편 오용석씨(36)를 만나 사방 산밖에 보이지 않는 강원도 양구에 보금자리를 틀고 8년째 농사를 짓고 있는 한명희(요안나·32·양구본당)씨.
그의 삶은 보람과 함께 늘 절망의 한 켠으로 다가서는 듯한 불안감이다. 불쑥불쑥 자라나는 아이들과 함께 한씨네의 빚은 어느새 1억원이 훌쩍 넘어버렸다. 영영 빚을 갚을 수 없겠다는 생각에 얼마 전부터는 인근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부업에 나서고 있다. 그나마 한씨네와 같은 이들의 빚은 농촌에 뿌리박고 농업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몸부림의 산물이다. 그런 몸부림이나마 칠 힘조차 남아있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인 게 농촌 현실이다.
허름한 농가를 얻어 농촌의 삶을 시작하며 「삶이란 신뢰를 쌓아 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키워온 한씨. 지금도 『같이 농사지을 자식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라는 속내를 내비치는 그는 해를 거듭할수록 쌓이는 불안감이 더 큰 무게로 다가온다.
「우리는 끝내 버려질 존재다」
농촌 현장에 선 농민들이 가슴 한 구석에 억눌러 두고 있는 위기의식. 버려질 존재이기 때문에 희망을 얘기할 수 없고 더군다나 미래가 있을 수 없다. 그냥 그런대로 살다가 지상에서의 생명을 지우는 것이다. 이제 절박함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한 농촌, 그 농촌의 들녘에서 만난 농민은 숱하게 뿜어낸 한숨으로 가슴마저 쪼그라든 모습이었다.
특집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