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독서는 야훼 하느님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의 대화이다. 소돔과 고모라를 두고 하느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벌어지는 대화인데, 아브라함은 소돔의 멸망을 막아보려 처음에는 의인 50명을 보아서라도 소돔을 용서해야 되지 않겠느냐 부탁하자 하느님은 의인 50명이 있다면 용서하리라 한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다시 45명으로 의인의 수를 줄이고 그 수는 40명 30명 20명 그리고 10명까지 줄어들지만 그곳에는 결국 의인 열 명이 없었기에 멸망의 도시로 남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어린아이들 장난 같기도 하고 조금은 유치해 보이기도 하는 이 대화에서 우리는 인간과 하느님의 대화, 곧 기도에 있어 중요한 점 한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하느님과의 대화에서 인간은 「자신의 뜻」을 하느님께 청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결과는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점은 오늘날 우리의 기도 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기도이다. 복음의 전반부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준다. 마태오 복음서에는 일곱가지의 청원의 내용이 나오지만 루가 복음에는 다섯가지의 청원기도로 이루어져 있고, 앞부분의 두가지 청원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비는 것이고 뒷부분의 세가지 청원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는 제자들에게 필요한 은총을 비는 내용이다.
우리는 흔히 주님의 기도를 가장 완전한 기도요 기도의 모범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의미는 단순히 이 기도를 반복하라는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때문에 주님의 기도가 가지는 진정한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의 기도의 내용과 이 기도의 형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오늘은 주님의 기도내용보다는 이 기도의 형식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그리스도인의 참다운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점을 같이 생각해 보고 싶다.
우리는 이 기도문의 교훈을 생각해 보기 위해 먼저 이 기도문의 주어와 목적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공동번역 성서는 번역상 주어가 확연히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성서 원문을 보면 이 기도문의 주어는 「당신의 이름」과 「아버지의 나라」이 두 가지가 주어가 되고, 거기에 비해 기도 드리는 주체인 우리는 동작의 대상이 되는 목적어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주님의 기도에서 주어,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하느님의 것이고, 거기에 비해 기도 드리는 우리는 어디까지나 동작의 대상이 되는 부차적인 위치라는 사실만 기억하면 될 것이다.
우리는 기도라 하면 은연중에 「나의 소원」과 「나의 희망」이것을 하느님께 청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이것이 반드시 틀렸다고 생각 할 필요도 없고 청원기도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자칫 청원기도에 집착하다 보면 「나의 희망」과 「나의 원의」만 볼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 「나의 희망」과 「하느님이 원하심」이 부합된다면 다행이겠지만 그것이 일치하지 않고, 하느님의 계획과 나의 뜻이 대립할 때, 「나의 뜻」과 「나의 희망」에만 주목하다 보면 자칫 나의 뜻을 위해 하느님의 뜻과 계획마저 변화되어야 할 무엇으로 생각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 중심의 기도」가 아니라 「내 중심의 기도」, 「혼자만의 독백의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좀 심하게 이야기하면 기도란 나의 소망을 위해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변화시켜 가는 과정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오늘 복음 후반부에 나오는 항구한 기도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기를…).
그러나 오늘 복음은 기도란 이것과는 차이가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주어의 자리에 하느님을 놓음으로써 우리가 먼저 보아야 할 것은 「하느님의 것」이요, 기도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느님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하자면 「하느님의 것」과 「우리의 것」이 양립할 때 우리가 우선해야 할 것은 「하느님의 것」과 「하느님의 계획」이라는 것, 그리고 변화의 대상을 하느님 쪽에서 찾음이 아니라 먼저 우리에게서 찾는 하느님 중심의 삶이 기도의 삶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반문할 수도 있다. 우리의 모든 기도문 뿐 아니라 우리가 바치는 기도도 모두 하느님을 주인의 자리에 놓지 않느냐고? 물론 외적으로 드러나는 주어는 하느님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외적 형식적 주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 삶 안에서 우리의 관심과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이리라!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짧지만 모범적인 기도는 바로 이 사실, 우리가 먼저 보아야 할 점은 무엇이고, 우리의 삶과 기도 안에서 중심이 되고 주인의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깨우쳐 주고 있는 것이다.
「나의 기도에서 나를 대상화 할 수 있음」. 이점이 바로 주님의 기도의 참다운 교훈은 아닐까….
말씀 안에서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