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관리국장 재임시절 얘기를 했으니 이젠 성모병원장 때의 얘기를 해야겠다.
성모병원 설립은 내가 관리국장에 부임 후 얼마되지 않아 추진됐었다. 66년 무렵으로 기억된다. 당시 지금의 성모병원 자리에 도립 직업보도소가 있었는데, 「도립」이면서도 운영자금은 교회가 책임을 지고 있었다. 분명 불합리한 처사였다.
나는 관리국장 부임 후 기회를 보다가 직업보도소측에 『대지 사용료를 내라』고 요구했다. 사용료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용료를 받음으로써 우리땅이라는 증거를 남겨두기 위해서였다. 즉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확보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2300여평의 대지에 평당 150원씩의 사용료를 석달간 받았다. 그후 나는 바로 건물의 철거를 요구했다.
건물 매입 과정은 지금 생각해도 마치 007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스릴 넘쳤다. 건물을 아주 좋은 조건에, 아무런 불상사없이 넘겨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정보」에서 앞섰기 때문이었다.
나는 병원으로 사용될 그 건물을 넘겨받기 위해 모든 채널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모았고, 때론 「교회의 일」임을 내세워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국회의장이던 이효상씨(대구 이문희 대주교의 부친)와 대통령 비서실장이던 이낙선씨, 그리고 충남도 정보과장이던 최모씨가 큰 도움이 됐다.
건물 매입 후 내부를 개조해 병원으로 활용했다. 독일 미세레올의 지원(200만 마르크)으로 증·개축하며 병원 규모를 확대했고 이후 가톨릭중앙의료원 자매병원으로, 그리고 가톨릭의대 부속병원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모병원 다시 세우기
경갑룡 주교님이 교구장에 부임하신 후 85년 3월 경주교님의 요청으로 나는 다시 병원장에 부임했다. 나는 은행빚을 갚고, 병원조직을 정비하고 강화하라는 조건부(?) 발령을 받았다.
우선 빚을 탕감하기 위해 차입금이 시급했다. 제일은행과 조흥은행 등 금융기관들을 설득해 돈을 빌려 3년에 걸쳐 70억이 넘는 빚을 갚았다. 또 이자가 연 4%에 불과한 가톨릭의대의 「OECF」자금으로 의료장비 등을 구입해 의료서비스의 질을 높이는데 힘을 쏟았다.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특단의 인사조치가 필요했다. 병원장 부임 후 어느날 병원 임직원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만취한 상태로 나의 처신에 불만을 토로한 의사가 있었다. 그의 말을 묵묵부답으로 들은 나는 다음날 그를 불러 조용히 병원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또 한번은 근무시간에 병원을 무단이탈한 의사를 역시 가차없이 내보냈다. 그 과정에서 중앙의료원측과 인사문제로 약간의 갈등이 있긴 했지만 결국 우리 병원측의 입장을 이해해주었다.
몇번의 강력한 인사조치가 뒤따르자 병원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졌다. 그렇게 7년을 보내고 92년 나의 마지막 사목지인 조치원본당 신부로 발령받았다. 나는 7년간의 병원장 재임동안 교구에서 지급하는 사제생활비 외에는 병원장으로서 한푼의 돈도 병원으로부터 받지 않았다. 사제는 돈에 어두워야 하고 사제가 돈이 많으면 안된다는 평소 나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나는 지난해 10월 28일 대전가톨릭대학교에서 수품 50주년 금경축 행사를 가졌다. 동료들과 지인들, 신자들 등 많은 분들이 오셔서 축하해주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주님은 나의 안식처
50년 사제생활을 되돌아 보며 갖게 되는 생각은 『나를 가장 잘 알고 나를 가장 편안하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 한분뿐』이라는 것이다. 금경축 축하 상본에 「주님 당신만이」라고 적은 것도 50년 사제 삶중에 기쁨과 슬픔, 사랑과 냉대, 관심과 무시 등 인간적으로 무수한 감정들이 교차했지만 「주님 당신만이」 저를 가장 잘 아시고 저의 안식처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후배 사제들에겐 기도하라고 부탁하고 싶다. 오늘날 사제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기도다. 은퇴후 어느 피정에서 만난 한 신자가 들려준 말이 늘 가슴속에 남아 있다. 성전을 지어 봉헌했던 그 사람은 『성당앞을 지나가며 늘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만 미사때 외에는 성당에서 신부님의 뒷모습을 볼 수 없더라』고 했다.
바로 기도하는 사제, 하느님을 찾는 사제, 영적으로 아버지인 사제를 찾는 신자들의 간절한 바람일 것이다. 교회가 하는 일(사업)에 비해 효과가 적은 것도 기도부족이 원인일 것이다.
한가지 덧붙인다면 누군가가 종부성사를 청할 때는 만사를 제쳐놓고 좇아가기를 바란다. 나의 사제생활 중에 수차례 특별한 경험을 한 일이지만 종부성사는 왜 사제로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곱씹을 수 있는 기회이고 하느님께서도 특별한 은총을 주시리라 믿는다.
『좋으신 주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유봉운 신부님 이야기가 이번호로 끝나고 다음주부터는 대구대교구 박상태 신부님의 삶과 신앙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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