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범한 사제의 회고
신심깊은 할아버지 덕에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됐고, 별 다른 생각없이 사제가 됐다. 혹자는 사제가 될 것이라는 굳은 결심을 하고 이 결심이 흔들릴 때마다 마음을 추스리는 노력을 골백번도 더 했다하지만 난 그런 과정을 겪지 않은 것 같다.
지나간 일들을 회고해 달라는 신문사의 요청을 받고 많은 생각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무엇하나 뚜렷히 내세울 것이 없는 사제로서의 삶이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조금은 할 말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제가 된지 25년이 어제 같았는데 어느새 50년이 훨씬 넘어섰다. 내 나이 84세. 이제 살 날도 얼마남지 않은 것 같다. 암울한 일제치하에서 태어나 해방되기 전 사제품을 받고 사목일선에서 활동하다 지금은 성가양로원에서 생활하는 나의 이야기들이 오늘을 사는 후배 사제들과 신자들에게 어떤 유익함을 선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생을 주님과 함께'하려 노력한 한 평범한 노사제의 삶과 신앙의 편린들이 이 글에 담겨있구나 생각하고 나의 이야기에 끝까지 귀기울여 주길 바란다.
조부의 자상한 사랑
나는 1918년 2월 28일 대구 서구 본리동 감천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박수조(야고보)와 어머니 김순이(벨따)사이의 3남3녀중 4번째로, 위로는 형님 1분 누님 2분, 아래로는 여동생과 남동생이 1명씩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6살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하고 자라는 나와 내 동생들이 불쌍해서인지 할아버지가 각별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다. 할아버지 성함은 박영덕(다미아노). 당시 대구 본당(현 계산 본당) 관할 공소였던 본리동 감천리에서 공소를 설립할 정도로 신심이 깊으신 분이셨다.
감천리는 본리동의 으뜸 마을인 가무내의 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가운데에 감천이라는 우물이 있었다. 이곳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나의 할아버지가 병인박해 후 본 마을인 가무내에 살다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감천리로 이사와 천주교를 믿음으로써 비롯됐다. 할아버지가 이 지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것이다. 할아버지 집에서 공소예절이 거행되다 만주로 이사간 신자 집을 본당에서 사서 새 공소를 차렸다. 이같이 감천리 공소를 설립한 사람은 나의 할아버지였고, 나의 큰 형(박순생 치릴로)이 초대 공소회장을 역임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예비신자들을 앞에두고 교리를 가르치시는 할아버지의 모습. '하느님'이라는 말만 나오면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얼굴이 상기되는 조부의 모습은 어린 내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할아버지는 판공성사 찰고를 위한 교육도 신자들을 집에 모아놓고 본인이 직접 하셨다.
사실 아버지를 대신한 조부의 자상한 사랑은 우리 형제들이 신앙의 길에서 이탈되지 않게 만드는 바탕이 되었으며 나를 사제의 길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나를 사제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 또 다른 한분이 계셨다. 수녀원에 들어갔다가 몸이 아파 수도자의 길을 포기하고 밖으로 나온 고모(박봉학 프란체스카)가 할아버지와 더불어 나에게 사제의 꿈을 키워 주신 분이시다. 고모는 당신이 성서를 읽을 때나 기도를 할 때 항상 나를 불러 옆에 앉혀놓고 함께 하자고 권유하고 조금이라도 신앙생활이 소홀하다 싶으면 너그럽게 나를 나무라시곤 하였다.
당시 대구 본당 보좌였던 김영제(요한) 신부님도 내가 사제성소에 대한 꿈을 키우는데 큰 도움을 주신 분. 공소를 방문하실 때마다 상본을 나눠주시며 사제의 삶에 대해 자상하게 설명해 주신 사려깊은 분이셨다는 기억이 난다. 신자들의 사정을 잘 헤아려 주셨고 특히 고해성사를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 어느때고 달려나와 성사를 주시는 분이셨다. 나도 항상 고해성사는 김신부님께 받았다. 김신부님은 내가 고해성사를 받길 원하면 『장차 신부가 될 아이에게 성사 안주면 내가 늙어서 젊은 신부한테 서러움을 받으면 어떡하나』하고 말씀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고해소로 들어가시곤 했다.
8살에 화원에 있는 보통학교(소학교)에 입학한 나는 감천리에서 10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통학했다. 당시 월배 벌판에 부는 겨울 바람은 유명했다. 모든 것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매서웠다. 학교갔다오면 온 몸이 얼어 다시 밖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질 정도였지만 공소에서 펼쳐지는 여러 행사에 빠진 적이 없었다. 어린마음에도 교회 활동을 소홀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아침기도는 일어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가 봉헌하도록 했지만 저녁기도만큼은 온 가족이 모여 바치게 했다. 이렇게 모여 진지하게 기도했던 기억들이 아직도 또렷하다.
소신학교 입학
주위의 권유로 보통학교 5학년때인 1932년에 나는 대구 성 유스티노 소신학교로 진학해 성직자가 되기위한 첫걸음을 시작했다. 내가 입학하기 전 해인 1931년에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대신학교와 소신학교로 분리됐으며 이때부터 소신학생은 서울 동성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해 5년과정을 졸업한 후 대구서 대신학교 과정을 이수토록 했다. 나는 이 규칙에 따라 대구에서 1년을 넘게 공부한 후 1934년 서울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다시 입학했다. 그러나 보통학교 졸업장 없인 입학이 안돼 서울 계성보통학교 졸업장을 만들어 입학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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