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70년 2월 출범한 목포지구 가톨릭 매스컴 위원회에 참여했다. 이 단체는 골롬바노회 모 안토니오 신부님이 우리나라 처음으로 전파를 통해 선교 활동을 하고자 설립했는데, 목포 각 성당에서 선발된 신자들로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나는 제작·방송을 맡았다. 직접 원고를 써서 방송하는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이때 목포에는 「라디오 목포」(지금의 목포 MBC) 방송국이 있어서, 이 방송국에 「마음의 안식처」종교 프로를 신설해 나를 비롯한 몇 사람이 매주 금요일에 녹음하여 일요일마다 전파를 내보냈다. 나로선 여태 해 온 레지오 활동도 벅찼지만 이 활동 또한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한 번도 펑크 내는 일 없이 방송 원고 집필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내 육신의 병은 악화 일로를 치달았다. 그리하여 1971년에는 레지오 주회합에 결석하는 횟수가 잦아지고, 내가 속한 「죄인의 의탁」 단원들이 생미사를 바쳐 주기에 이르렀다. 이 즈음 『박 모세가 죽게 되었다』는 소문이 신자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만큼 병세가 심각하고 피골이 상접했다. 아들의 병을 고쳐 보려고 혼신의 힘을 기울이던 부모님이 지친 나머지 손을 놓은 지 이미 오래 전인 터라, 나는 예수님께서 겪으신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고독을 되씹으며 죽음을 향해 나아갔다.
그때 나의 기도는 두 세계를 오락가락했다. 그 하나는 천국에 대한 열망이었다. 비록 허물 많은 인간이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영생을 주십사 간청했다. 또다른 기도는 현세적인 것이었다. 하느님은 전선한 분이시니, 당신께서 응답하신 대로 나에게 건강을 주시어 여한 없이 살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두 기도 다음에는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하고 온전히 주님 의향에 맡기었다. 그런데 이 무렵 나의 심금을 울리는 일이 있었다. 그 하나는 서울에 사는 목포중·고 몇몇 동창들이 내 소식을 듣고 성금을 모아 직접 목포에 내려와 나를 문병한 것이다. 금액도 금액이지만 천리 길을 달려온 정성이 눈물겨웠다. 다른 하나는 가톨릭 매스컴 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는 박동철 의학박사가 나를 진료하고 한동안 약을 무료로 제공한 일이다. 오랫동안 약을 쓰지 못한 나에게 이 투약은 금새 효력을 내어 나를 죽음으로부터 구해 주었다.
이러한 가운데 1972년을 맞았다. 나는 그 때까지 나에 대한 하느님의 은총이 성모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었음을 지금도 확신한다. 내가 레지오 협조단원에 이어 행동단원으로서 열심히 살아왔음은 곧 성모님의 보살핌이 있었기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1972년에도 그러했다. 그 해 3월 내 본당인 경동 성당에 새로 부임하신 김종남(로마노) 주임신부님은 사제관 처마 밑에 초라하게 모셔진 성모상을 철거하고 새로 성모 동산을 조성하는 대역사에 착수했다. 전 신자들이 한마음으로 참여한 가운데 공사가 진행되던 중, 하루는 김민수(디모테오) 보좌신부님이 나를 찾아왔다. 신부님은 나에게 「성모의 밤」축시를 부탁했다. 나는 거리낌없이 응낙했다. 레지오 단원으로서 이보다 큰 영예가 없었다. 그런데 「성모의 밤」행사는 성모 동산 준공이 늦어져 6월 10일에야 거행되었다. 이날 나는 성당을 가득 메운 교우들 앞에서 축시 「당신 마음 안에 살게 하소서」를 낭송했다. 본당 전체 신자의 성모님 공경과 사랑을 담은 내용이었다. 그리고 김종남 신부님이 『이 감격의 날에 마음의 예물을 봉헌하자』고 제안했을 때 1년간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나는 이후 어떤 상황에서도 이 약속을 거르지 않았다. 아주 극심한 고통중에도 이를 악물고 묵주기도를 바쳤다.
이렇게 성모님께 자신을 온전히 위탁하면서 나에게는 새로운 용기와 지혜가 주어졌다. 하느님의 응답을 실천하기 위한 용기요 지혜였다. 나는 내가 활동하고 있던 가톨릭 매스컴 위원회 모 안토니오 지도신부님의 이름으로 광고를 내기로 하고 신부님의 허락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 해 9월 24일자 「가톨릭 시보」(지금의 「가톨릭 신문」)에 「인생의 반려자를 찾고 있음」이라는 제목의 유료 광고를 게재했다. 그 내용은 나의 비색한 처지와 강인한 투병 의지를 담고 있었다. 세상 사람의 눈에는 만용으로 보였을 이 시도는 어느 곳엔가 반드시 반려자가 있으리라는 확신의 발로였다. 나의 이 열망은 일주일 만에 이루어졌다. 같은 해 10월 1일 대구 아가씨에게서 편지가 왔다. 『순교자의 정신으로 그이에게 가겠습니다』. 그녀의 첫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바로 내가 고대하던 인생의 반려자가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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