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나타난 여인은 하느님께서 보내 주셨다고 믿는다. 하느님은 나의 간절한 기도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마침내 나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시기 시작한 것이다. 수도자로 일생을 살고자 하였던 이 여인은 수녀가 되려고 여러 수녀원을 전전했다. 그것은 외교인인 아버지가 딸이 수녀 되는 것을 한사코 막았기 때문이다. 전국 어디든 딸이 있는 수도원을 알아내어 『내 딸을 내놓으라』고 하면, 수도원에서는 하나같이 『아버지를 설득하고 오라』면서 내보냈다. 결국 더 갈 곳이 없어 심란해 있던 그녀가 미사 참례하러 성당에 갔다가 「가톨릭 시보」(현 가톨릭신문)를 보게 된 것이다. 인생의 반려자를 찾는다는 광고를 보는 순간, 망치로 뒤통수를 가격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수녀가 되려고 그처럼 노력해도 이뤄지지 않은 것은 바로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함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급기야 「수녀로서 한평생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것도 좋지만, 반려자를 애타게 찾는 이 남자를 통해 하느님께 봉헌하자!」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것이 순교자의 정신으로 중환자인 나에게 오겠다는 여인의 편지 내용이었다.
우리는 서신 왕래와 전화로 서로의 마음을 전했다. 이미 여인의 결심이 확고한 까닭에 우리가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때 여인을 위해 쓴 시 「난(蘭)」은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당신의 눈길/고요히/하늘을 간다//영겹 이어 온/청자빛 고움으로/오늘을 사는//당신의 가슴/그리움이 뜨거운/소망의 언어와//맑고 향그러이/숨결 뿜어 올리는/은은한 기품에//사무친 향수/목메어 오는 이름//난아! 난아!//당신의 눈빛/올올이 수놓으며/언제고 언제고 머물러 준다면//내 영혼 쉴 데 없는 길섶에/자장가이듯/바람 감미로우리』 여인의 이름(송춘란)에서 「난」을 취해 난초와 대입하여 여인의 인품과 나의 그리움을 담았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걸림돌이 많았다. 가장 큰 걸림돌은 여인의 부친이었다. 사윗감이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운 중환자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단박에 결혼을 반대했다. 나로선 생명의 동아줄이 끊어지는 듯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여인은 나에게 용기를 주었고, 결국 부친은 딸의 단호한 태도에 결혼을 허락했다.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역사하심을 보여 주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1972년 11월 11일에 광주대교구 경동 성당에서 혼인성사를 받았다. 이날 주례 사제인 김종남 신부님은 나의 시「한빛」을 낭송해 주었는데, 나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오열하였고, 이에 결혼 하객들이 눈물 바다를 이루었다. 대부분 고난의 삶을 살고 있는 나의 신세를 잘 알고 있어서였다.
이렇게 간절히 원하던 결혼을 하였으나, 당장에 병세가 호전되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시일이 지날수록 경제적인 곤란이 닥쳤다. 여태껏 나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주던 여동생이 결혼한 후였으므로 아버지가 주는 생활비만으로는 약값 마련이 어려웠다. 이에 아내는 결혼 예단과 폐물을 헐값으로 팔아 약값을 마련했다. 그러나 「한강에 돌던지기」라는 말이 있듯이 얼마가지 않아 동이 났다. 그렇지만 우리의 결혼은 나에게 희망이요 기둥이었다. 분명한 것은 혼자서 겪던 고통을 함께 한다는 점이었다. 아내는 내 건강의 회복을 열망하면서 매일 더러운 환부를 닦아내고 남이 효과를 보았다는 약을 만들어 정성스러운 기도가 되었다. 더욱이 아내는 나보다 더 많은 기도를 바쳤다. 어느 때는 기도를 하다말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1973년 6월 10일을 맞았다. 이 날이야말로 내가 성모님께 약속했던 1년 동안의 묵주기도를 모두 마치는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성령 강림 대축일이었다. 나는 아내와 더불어 미사 중에 감격의 봉헌을 하였다. 그 많은 날 혹독한 고통 속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도를 바쳤다는 사실과, 그 과정에서 당신이 보내주신 반려자와 성 가정을 이룬 데 대한 감사가 완쾌에의 청원과 어우러진 봉헌이었다. 그리고 기적은 이튿날부터 나타났다. 당시 고름이 나오는 환부가 아홉 군데였는데 하나씩 메워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6월 30일에 마지막 남은 환부에서 뼛조각이 나온 다음 깨끗이 치유되었다. 더 이상 고통도 없고 진물도 흐르지 않았다. 그 후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으니, 이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보여 주신 기적이었다! 『하느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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