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5일은 우리나라가 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광복절이자 성모승천대축일이다. 이 뜻깊은 해를 맞아 우리는 우리의 가장 인접한 이웃 국가이자 일제 36년이라는 치욕과 고통의 역사를 우리에게 안겨준 일본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일본은 최근 들어 역사 교과서 왜곡 등으로 표출되고 있는 우경화 경향을 보이면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에 또 한번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안겨주고 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이러한 일본에 대해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 특히 진리와 평화, 진정한 화해의 수호자가 되어야 하는 그리스도교 교회인 일본 가톨릭교회는 이러한 역사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나아가 앞으로 한국과 일본은 물론 아시아 대륙의 복음화를 위한 동반자의 일원이어야 할 일본 교회의 소명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1981년 2월 25일 눈발이 흩날리는 히로시마의 평화기념공원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전세계를 향해 평화의 메시지를 보냈다. 교황은 이 메시지에서 네 번에 걸쳐 『과거를 돌아보며 반성을 하는 것은 장래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행동』이라고 강조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86년 일본주교회의 의장인 시라야나기 세이이치 대주교는 제4회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 제4차 총회에서 일본 교회의 전쟁 협력 책임을 고백했다.
『우리 일본의 주교들은 일본인으로서, 그리고 일본 교회의 한 사람으로서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일으킨 비참한 사건에 대해서 하느님과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형제 자매들에게 용서를 청하는 바입니다』다시 10년이 지난 1995년 2월 25일 일본 주교단은 「평화에의 결의-전후 50년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전쟁이 끝난지 50년이 지난 때였다.
이 성명에서 일본 가톨릭 교회는 주교단의 이름으로 일본 가톨릭교회의 전쟁 협력 책임을 절실하게 통감하며 『일본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귀중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마음 속 깊이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말했다.
95년 '평화에의 결의'성명 발표
이 성명은 전후 처음으로 일본 가톨릭 교회를 대표하는 주교단의 이름으로 발표된 공식 문건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성명에서 일본 교회는 전쟁이 얼마나 비복음적인 행위인가를 규명하고 전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자는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스스로 막아버리는 것이라고 강조함으로써 일본 교회의 과거를 비통한 심정으로 성찰하고 있다. 성명은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비도덕성과 전쟁의 과정에서 범한 무수한 범죄 행위들에 대해 사죄하고 이 상처를 보상해줄 책임이 일본에게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특히 성명은 일본 가톨릭 교회가 전쟁의 의도 속에 감추어져 있던 『비인간적, 비복음적인 흐름을 알아채지 못한 채 귀중한 생명을 지키고 또 하느님의 뜻을 완수해야 할 예언자적인 역할에 대해서 인식이 부족했다』고 인정했다.
그후 또 다시 몇 년이 지난 2001년 오늘 일본은 다시 한번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깊은 상처를 안겨주고 있다. 이른바 「역사교과서 왜곡」이 그것이다. 역사적인 성찰을 통해 과거의 잘못을 고백하고 참된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다짐했던 일본 교회는 과거 역사를 왜곡하려는 이같은 움직임에 대해 무심할 수 없었다.
때문에 일본 가톨릭교회는 주교회의 정의평화협의회를 중심으로 지난 3월 개신교 관계자들과 함께 문부과학성을 방문해 왜곡 교과서가 『과거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긍정하고 천황제 지배를 찬미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를 인정하는 것은 『과거 대일본제국군대가 행한 침략과 만행의 역사를 은폐, 왜곡, 미화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정의평화협의회는 가톨릭계 교육기관에서 일장기, 기미가요, 연호 사용을 금할 것을 요청하고 일본 정부 당국의 과거 침략사 미화에 협력하지 않도록 주의를 요청한 바 있다.
사실 일본 천주교 정평협이 일본의 우경화 경향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더 오래 전부터이다. 1995년 4월 부활절을 맞아 발표한 담화문에서 정평협은 그 두달 전 일본 주교단이 발표한 '평화의 결의'를 언급하면서 천황제 국가주의 하에서 교회의 전쟁 책임을 다시 한번 고백했다.
아울러 경제 성장의 이면에 감춰진 비복음적인 요소들에 대해 지적하면서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
담화는 『예전의 전쟁터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형제 자매들을 병사로서, 하역부로서 그리고 위안부로서 강제 연행했던 일본은 다시금 그들을 착취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침략 전쟁에 이은 경제 침략, 국제 공헌이란 미명의 자위대 해외 파병까지 허용하고 있다』며 우려했던 것이다.
50년간 일제에 협력한 일본교회
그러면 일본교회는 과연 어떻게 일제의 전쟁에 협력했었던가.
일본은 19세기 중반 구미 열강의 압력으로 개항을 하면서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제국주의적인 식민지 정책을 통해 구미 제국과 어깨를 함께 하는 정책을 택하고 대외 팽창 정책을 강화한 일본은 청일 전쟁으로써 아시아에 대한 침략 의도를 드러냈고 러일전쟁, 한일합방, 만주사변, 그리고 중일 전쟁, 나아가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청일전쟁에서 1945년 무조건 항복으로 패전까지 50년 세월 동안 일본 교회는 천황제를 기반으로 한 군국주의, 국가주의에 가담하고 협력해야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교회는 신사 참배를 권하게 됐고 전쟁협력을 장려함으로써 후일 역사적 반성과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일본 교회가 1986년 시라야나기 추기경의 전쟁 책임 고백 이후 이어간 과거 성찰은 새로운 미래를 향한 자기 쇄신의 길이었다. 용감하게 교회의 역사적인 과오를 고백하고 새로운 천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는 노력이었다.
세계 평화·복음화위해 함께 나갈 때
오늘날 일본 교회는 일본이 지닌 인구와 국력, 경제적인 성장 등에 걸맞지 않게 매우 미미한 상황이다. 16개 교구에 총 신자수는 43만4572명에 불과하다. 400만명을 넘어선 한국천주교회와 비교할 때 그 사회적인 영향력이 얼마나 있을지에 대해서도 의문이다.
하지만 일본 교회는 이러한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나름대로 진리와 그리스도의 빛에 비추어 자신이 속한 사회와 세상을 변화시켜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일본 교회는 한국교회와 더욱 긴밀한 관계와 교류, 유대와 협력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
일본과 한국교회는 지난 몇 년간 주교 교류모임이나 청소년 교류 모임 등을 통해 더 깊은 우호 선린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번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와 관련해서도 양국 교회는 협력하고 연대하려는 움직임을 적지 않게 보여왔다.
광복이 참 의미를 갖기 위해서 일본은 보다 더 진지한 역사적인 성찰, 그리고 그것을 통해 변화되고 쇄신된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며 한국은 역사적 교훈을 바탕으로 참된 화해를 이루고 그 위에서 양국의 화해와 평화, 나아가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복음화를 위해 함께 발맞춰야 할 것이다.
■ 일본 천주교회의 전쟁 협력 경과
35년 ‘천황께 충성다짐’ 교서 선포
43년 글 ‘대동아전쟁과 가톨릭’으로 전쟁합리화
44년 소논문 ‘신자 총궐기 촉구「로 전쟁협력 부추켜
『사이판 섬이 함락되어 적의 손에 넘어간 소식을 접한 1억 국민은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이십 수년 동안 황은을 입은 이 섬이 적의 군화에 짓밟혀 있다는 것을 상상할 때마다 이를 갈고 팔을 걷어 붙이고 싶은 심정이다…우리들은 후회하거나 분개하거나 망연자실해서는 안된다. 제국이 최대의 운명의 갈림길에 서 잇는 마당에 우리들은 사이판섬의 용사들이 지녔던 마음 같이 건곤일척(乾坤一擲: 흥망을 걸고 온 힘을 다 기울여 마지막 승부를 겨룸)의 마음으로 총진군을 결행해야 한다』일본 주교회의 총무 타구치 호오고로오 주교는 1944년 『신자 총궐기를 촉구함』이라는 소논문을 통해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총궐기」해야 한다고 부추기고 있었다.
일본 교회는 일본이 다른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앞서 근대화를 이루고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정책을 통해서 구미 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러한 국가 정책에 협력하기 시작했고 결국은 역사에 오점을 남기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앞서 1943년 9월 28일 일본 가톨릭교회는 「일본 천주교 전시 활동 지침」을 발표해 『총력을 결집해 대동아 전쟁의 목적 완수에 매진할 것』과 『국체의 본의(本義)에 의거하여 본 교단의 교의를 선포하며 신앙 생활의 쇄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도쿄 교구장 도이 타츠오 대주교는 1943년 8월호 소리(聲) 잡지에 「대동아전쟁과 가톨릭」이라는 글을 발표하고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목적은 동아시아 주변의 모든 민족들을 해방시키고 오래 지속될 평화 건설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아가 일본이 무기를 들게 된 것은 하느님의 깊은 배려에 근거한 것이므로 세계의 3억5천만 가톨릭신자들은 일본의 행동에 찬동을 보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역설했다.
1941년 일본 정부는 종교를 이용해서 가톨릭 신자가 대부분인 필리핀 지역의 종교 선무 공작을 목적으로 일본 교회로부터 사제와 신학생, 신자들을 뽑아 종교 선무 공작 활동을 벌였다. 이듬해인 1942년에는 오사카 교구장 타구치 호오고로오 주교를 필리핀 종교 선무반으로 차출했다.
일본교회의 전쟁 협력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있어왔다. 1935년 3월 31일 큐슈 교구장 4명은 공동 교서를 발표했다. 그 요지는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고 일본을 위해 기도할 것과 천황 통치 국가로서 천황가 중심주의의 위대한 점을 빛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달 뒤인 4월 25일에는 모든 일본 교구장이 공동 교서를 발표했으며 여기서 일본 교회는 일본 가톨릭신자가 나라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당국에 비행기를 헌납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하고 나가사키 「가톨릭 병기 헌납회」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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