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임으로 도착한 첫 소임지
명진본당(현 마산교구 거제본당)으로 향하는 나의 마음은 사제의 신분으로 본당 신자들을 처음 대한다는 설레임으로 들떠 있었다. 첫 소임지행에는 어머니와 고모가 동행했다. 우리는 마산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통영까지 배를 타고 가 거기서 또 거제로 들어가는 배를 갈아탔다. 거제읍에서 명진까지는 2㎞정도. 한걸음에 내달아 명진성당에 도착했다.
명진본당은 작은 시골본당이었지만 관할 공소는 10개에 달했다. 공소방문때 이 공소 저공소를 왔다갔다 하다보면 근 40㎞에 가까운 거리를 걸어다닐 때도 있었다. 45년 부활판공때 였다. 몇개 공소를 거친 후 와현 공소에 도착했다. 그 전 공소에서 비를 맞아 온 몸이 축축한 상태라 피곤함이 더했지만 와현공소에서는 병자가 많아 미사 봉헌 후 봉성체를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추위가 들었고 더 이상 발을 옮길 힘이 없었다. 결국 와현 공소 신자들의 '신부를 걱정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더 이상 공소 방문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때 남은 공소가 지세포 공소 등 몇군데가 있었는데, 돌이켜 보건대 방문을 하지 못한 공소신자들에게 정말 죄송하다. 육신의 아픔을 핑계로 신자들의 영신적 아픔을 달래주길 포기했다는 생각이 들어 후회스럽다. 와현에서 하룻밤을 자고 거제읍으로 나가 진찰을 받아보니 장티푸스였다.
부활판공 때 일어난 또 다른 이야기. 명진본당에서 사목할 때는 일제말기였다. 그래서그런지 일인 순사(경찰)들의 감시가 무척 심했다. 심지어 옷입는 것까지 간섭하던 시기였으니, 적대적인 말을 하면 여차없이 끌고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판공 때 신자들이 모여드니 아니나다를까 순사들이 찾아와 "보국대에는 안나오면서 이런 곳에는 잘 나오는 것 아니냐"하고 빈정거렸다. 그래서 내가 "신자들이 보국대에 잘 안 나가더냐"하고 반문하니 "신자들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사람들 한테 하는 이야기"라고 얼버무렸다. 내가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들이 할 일이지, 나한테 왜 묻는냐?"하고 말하자 슬그머니 자취를 감춰버렸다.
1945년 8월 15일. 명진본당 부임 1년 2개월여 만에 드디어 조국이 해방됐다. 그 1년2개월여의 기간이 해방후 지금까지의 사제생활 기간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일제하에서 사목자로서의 본분을 지켜나가는 것이 얼마나 큰 스트레스였는지…당시에는 공소 신자들이 내는 교무금을 '공소전'(公所錢)이라 했는데 이를 거두는 방법이 참 불합리했던 것 같다. 재력에 따라서 금액을 배분하는 것이 아니라 1인당 얼마씩 똑같은 액수를 할당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잘못된 제도가 냉담신자를 양산하는 근원이 될 수도 있었다. 후에 계산동에 부임해서 이를 시정, 형편에 따라서 교무금을 내도록 했다.
본당 공동체의 활성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봤으나 한적한 시골에 소재해 있던 본당여건상 큰 기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성당을 옮기려 거제읍에 60평의 성당을 신축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본당다운 면모를 비로소 갖출 수가 있었다.
49년 삼덕본당 발령
첫 소임지인 명진본당에서의 사목은 1949년 9월 20일부로 대구 삼덕본당으로 발령이 남으로써 끝을 맺게 된다.
원래 삼덕본당은 일제가 일본신자들을 위해 지은 성당으로 이름이 미까사마찌(삼립정, 三笠町)'소화 데레사 성당'이었다. 해방이후 행정구역 명칭이 변경됨에 따라 삼립정에서 지금의 삼덕동으로 개칭되었다. 이에따라 삼립정 성당도 삼덕동 성당으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
삼덕본당에 온지 1년도 채 안되었을 때 민족의 비극 6·25가 발발했다. 서울로 유학갔던 신학생들이 돌아와 전황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대구역 뒷편에 있던 밤숲에 북한군들의 박격포탄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피난을 하느냐 마느냐 갈등의 연속이었다. 서울 대신학교 학장을 하던 정규만 신부가 대구로 피난왔다. 다른 곳으로 떠난다는 정신부에게 제의를 맡기자 자기 한몸 움직이는 것도 힘들텐데 기꺼이 짐을 맡아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 미련한 짓이었다. 동기가 부탁을 하니 거절을 못해 짐을 맡아줬지만 속으론 참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당시 계산성당 주임이던 서정길 신부님(대주교, 7대 대구대교구장)과 함께 교구청으로 들어가 최덕홍 주교님을 만났다. 최주교님께서는 "박신부 어떡할래?"하고 물으셨다.
"남겠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최주교님은 반가운 표정을 하며 "그래 박신부 너도 남고"라고 말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교구에 남은 사람이 최주교님, 서정길 신부님, 관리국장 장병화 신부님(주교, 초대 마산교구장)그리고 나였다. 이렇게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자'라는 심정으로 피난길을 포기하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져 불안감없이 덤덤히 성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한편 성당을 유아들의 교육장소로 제공해 달라는 피난온 신자들의 요청으로 52년 4월 삼덕 유치원을 개원했다. 처음에 20명으로 시작한 원아가 금방 80여명으로 늘어났고 나중에 2명의 보모와 담당 수녀가 부임하는 등 명실상부한 유아교육원의 대명사로 성장했다.
55년 6월 15일 대구교구청에서 근무하라는 통지를 받고 정들었던 삼덕성당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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