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난치병을 이겨냈다는 사실! 또한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셨다는 사실은 나에게 형언하기 어려운 기쁨이었다. 나의 믿음을 하느님께서 기특하게 보시고 마침내 오랜 소망을 이루어 주셨으니 그렇지 않겠는가! 처음 얼마 동안은 환부에서 나온 뼛조각이 또 나올 것이라 여겼다. 물경 20여 년에 걸쳐 투병한 셈이니 뼛조각 한두 개로 그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일부러 원거리를 도보로 다니는가 하면, 탁구장에 가서 두세 시간 땀을 흘리며 탁구를 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뼛조각은 더 나오지 않았다. 이렇듯 하느님께서 나에게 보여 주신 기적은 완벽한 것이었다. 그 많은 세월 간절하게 바랐던 대로 병이 완쾌했다는 게 실로 꿈 같은 일이었다. 정녕코 전능하신 하느님의 역사하심이었다!경사는 또 있었다. 완쾌 한 달여 만에 첫아들이 태어났다. 그러나 마냥 기뻐하고 있을 수 없었다. 두 사람 입 걱정도 빠듯한 터에 또 한 생명이 태어났은즉 빨리 자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루아침에 부모가 되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다급하게 하였다. 그렇다고 누구에게서 재정적인 도움을 받을 여건이 아니었다. 여태까지 부친과 동생 등으로부터 물질적인 지원을 받아 왔으나 이젠 아니었다. 우리 부부가 직접 생활 전선에 나서기로 하였다. 내가 직장을 알아보는 중에 아내는 화장품 가방을 메고 가정 판매에 나섰다. 그리고 매일 녹초가 되어 귀가했다. 그러던 중 아내에게 목포 골롬반 병원 세탁부에 직장이 마련됐다. 이 일 또한 중노동이었지만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병원 안에서 근무하게 되어 다행이다 싶어했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는 맞벌이가 일반화되지 않고, 또 나의 부친께서 목포에서는 이름만 대도 다 아는 기관장으로 계시는 까닭에 '누구 며느리가 화장품 장사를 한다' 하고 소문나면 체면이 깎인다고 본가에서 아내의 화장품 장사를 만류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급기야 취업을 단념하고 아기를 돌보는 한편 애완 조류를 사육하기로 하였다. 물론 단칸방살이를 하는 터에 전업으로 새를 키울 만한 장소가 따로 있을 리 만무했다. 내가 생각해 낸 것은, 방안 벽 쪽으로 새장들을 가득히 얹어 놓고 커튼을 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수십 쌍의 십자매와 잉꼬, 문조, 금란조, 카나리아 등을 사육했다. 이들이 떠드는 소음과 먼지 때문에 아기를 방에 둘 수 없었다. 그래서 아들을 아침부터 유모차에 태워 방문 밖에 두었다가 오후에 커튼을 내린 다음에야 방으로 데려왔다.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를 알면서도 자립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이 새 사육은 혼자 힘으로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사료 조달이 문제였다. 여기에서도 아내의 도움이 필요했다. 아내는 매주 토요일에 한복 저고리 동정을 도매로 구입하여 직장이 쉬는 일요일에 시골 장을 찾아가 팔고 거기에서 새의 모이인 차조를 몇 말씩 사 왔다. 이렇게 하여 새들을 사육할 수 있었고, 부화된 새끼들이 스스로 모이를 먹을 무렵에 이들을 애완 조류 판매업소에 넘기었다. 이로써 노력한 만큼 대가를 얻는 보람이 있었다.
그제야 가족들의 건강이 염려되었다. 특히 면역이 약한 어린아들에게 병이라도 찾아들면 큰일이었다. 그래서 방이 두 칸인 집으로 이사하여 방 하나를 새 사육장으로 하였다. 그 후 새들과의 생활을 통해 경제적인 어려움이 조금 풀렸으며, 무엇보다도 내가 생활인이라는 긍지를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75년에는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나로서는 입이 벌어질 경사였으나 아내는 출산을 전후하여 적잖이 고통스러워 하였다. 그렇지 않겠는가. 허약한 몸으로 임신한 데다 병원 세탁 일을 하랴 시골 장을 찾아 다니랴, 거기에다 가사를 돌보랴, 하루하루 힘겨워 하는 게 역력했다. 어느 날은 아내가 직장에서 쓰러지는 일마저 있었다. 그럴 때면 죄스럽기 그지없었다.
이처럼 아둥바둥 살아가면서도 문학에 대한 집념은 여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제2의 인생은 문학으로써 하느님과의 약속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내가 투병중에 하느님께 다짐했던 기도가 "저에게 완쾌를 주시면 신앙인답게 살면서 문학을 통해 하느님 영광을 드러내겠습니다"였던 것이다. 이제 건강인으로 살고 있으니 내가 주력해야 할 것은 문학이었다. 이 때까지 한낱 지방 문사의 수준이라 할지언정 나에게는 인생의 청사진이요 나의 삶을 확인시켜 주는 맥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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