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의 선구자 광암 이벽(檗) 선생이 있다. 이벽 선생은 권철신 정약전 등과 함께 한국 천주교를 창립한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 스스로의 힘으로 창립된 자랑스런 조선 교회는 처음부터 모든 것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조선 천주교 창립 후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1785년, 김범우가 귀양가는 을사추조 적발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 와중에서 천주교 신자가 있는 가정에서는 자기 집안에 불행을 가져올지도 모를 이 종교를 버리게 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이 동원된다. 가족간의 갈등은 물론 가정이 와해되는 아픔을 겪는 가정이 생겨난다.
이벽의 아버지도 아들을 배교시키기 위해 갖가지 묘책을 짜내지만 이벽 성조가 고집을 부리자 마지막으로 아버지 이부만은 목을 매어 자살하려고까지 한다.
이것을 본 이벽은 「육친의 부모」를 배신할 수도 「우주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배반할 수도 없는 현실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갈등한다. 결국 한동안 자신의 신앙을 감추고 외부와 모든 연락을 끊은 채 살아가지만 결국 자신의 배교적 행위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육친의 부모와 하느님과의 갈등으로 방황하다 1786년 봄 33세의 젊은 나이로 길 위에서 자신의 삶을 마감하게 된다.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이러한 아픔들 위에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 가지 단절어를 듣게 되는데 오늘 같이 묵상해보고 싶은 것은 두 번째 단절어이다.
이 두번째 단절어는 아마도 복음서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중의 하나요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예수님 자신의 사명이 평화를 주러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말씀,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그분을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결과는 가정의 평화와 일치가 아니라 가정의 분열이라는 말씀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기에 충분한 말씀이다.
그러나 당혹감을 뒤로하고 이 말씀을 나름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평화에 대한 개념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분열이 가지는 의의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평화. 많은 경우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나 어떤 결과로 주어지는 무엇으로,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그 무엇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란 공의회 문헌의 정의대로 정의의 실현인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인간 사회에 부여하신 질서, 또 항상 보다 완전한 정의를 갈망하는 인간들이 실현해야 할 그 질서의 현실화가 바로 평화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가치의 구현인 것이다. 평화가 완성된 그 무엇이 아니라 실현해 나가야할 그 무엇이라면 그리고 평화가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질서의 확립이라면 이 평화는 반드시 구질서와의 갈등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참 평화는 위선적인 거짓 평화와의 단절의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우리 사회의 일부가 옛날 군사 독재를 그리워하는 이유도 개혁의 완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우리가 겪어야만 되는 구질서와의 분열이 너무나 아프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분열이 가지는 의의. 묵시문학계에서는 역사의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크게는 우주에 이르기까지 크나큰 붕괴현상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겪는 가정의 분열은 종말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한가지 전조라는 것이다.
이 분열은 그 자체로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위해 겪을 수밖에 없는 해산의 아픔과도 같은 진통이라는 것이다. 즉 과도기적인 혼란으로 새로운 무엇을 이루기 위해 치러야 할 통과의례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을 분열을 일으키는 분으로 소개할 수밖에 없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 분 선포의 핵심이 바로 하느님 나라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때문에 예수님이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이 말씀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씀인데, 이것에 우리가 반감을 느끼는 이유는 결과만 중요시하고 과정에는 무관심한 우리의 태도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과정 없는 결과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비록 우연적인 결과를 바라는 헛된 망상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결과는 땀과 수고가 동반된 과정이 있을 때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제 비유적으로 결론을 내리면 이러한 과정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똑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을 가로막는 방해물들, 때로는 그것이 가장 가까운 가족일 수도 있지만 그 아픔을 뛰어 넘는 거기에서 신앙의 열매는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제 조용히 생각해보자! 오늘 우리가 분열의 아픔을 겪어야 할 나의 신앙의 방해물들이 무엇인지 말이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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