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동냥으로만 듣던 '황사영 백서' 진본, 그 앞에 서면 몇 뼘 안되는 비단쪽이 풍겨내는 불타는 신앙심과 깊은 영성에 절로 떨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지 모를 일이다. 그 떨림은 순교 유산에 무심했던 오늘을 깨치는 채찍질이며 과거에 대한 반성, 그리고 새로운 각오다.
성모승천대축일에 맞이한 신앙의 유산은 단순한 고래(古來)의 유물이나 유품이 아니라 죽어서도 짙은 향내를 전하는 믿음의 실재를 전해준다. 그래서 선조의 얼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는 유산과의 만남은 우리 민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다.
비단에 깨알같은 붓글씨로 쓴 최초의 순교열전인 황사영 백서를 비롯해 정약종의 주교요지, 천주실의, 유중철·이순이의 십자고상 등 100여점의 유물은 죽음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었던 믿음의 선각자들의 모습을 엿보게 할 것이다. 신앙의 유산을 되찾은 기쁨과 함께 시작돼 새롭게 변모되는 자신을 발견해나가는 신앙의 여정의 한 페이지에 '신앙의 향기 200년전'을 아로새겨 보자.
▲ 교요지 필사본과 판목 정약종이 한글로 쓴 최초의 교리서인 '주교요지'는 천주의 존재, 영혼의 불멸 등을 밝힌 상권과 천주의 강생과 구속의 도리 등을 밝힌 하권 등 두 권으로 되어 있다. 초기교회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주교요지는 필사본으로 전해져 오다 병인박해 직전인 1864년 목판본으로 간행돼 박해를 이겨낸 신앙을 증거해주고 있다.
▲ 황사영 백서(사진) 교회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이 신유박해로 쫓기는 와중에 충청도 제천 배론의 교우촌 토굴에 은거하며 기록한 백서는 조선 교회의 박해현황을 최초로 담은 박해보고서이자 신앙의 자유를 향한 선각자의 의지를 담아낸 청원서이기도 하다. 가로 62cm, 세로 38cm의 흰 명주에 가는붓으로 씌여진 백서는 모두 1만3384자로 한 자 한 자가 박해로 인한 순교자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듯하다.
황사영의 체포와 함께 의금부에 압수돼 사라질 뻔한 백서는 1894년 갑오경쟁 때 또 한번 파기될 위험에 처했다가 신자 관리인 이건영(요셉)에 의해 화를 면하고 뮈텔 주교에 전해졌다. 1925년 조선순교자 79위의 시복식 때 한국교회가 드리는 선물로 교황청에 보내져 소장돼왔다.
황사영의 체포와 함께 의금부에 압수돼 사라질 뻔한 백서는 1894년 갑오경쟁 때 또 한번 파기될 위험에 처했다가 신자 관리인 이건영(요셉)에 의해 화를 면하고 뮈텔 주교에 전해졌다. 1925년 조선순교자 79위의 시복식 때 한국교회가 드리는 선물로 교황청에 보내져 소장돼왔다.
▲ 유중철·이순이의 십자고상 신유박해 당시 전주에 살던 동정부부 유중철(요한)과 이순이(누갈다)는 시부 유항검과 시모, 시동생 등 일가족이 함께 순교의 관을 쓰는 영광에 동참했다.
전시되고 있는 십자고상은 그 가족들이 묘소를 조남천에서 전주 치명자산으로 이장할 때 발굴돼 호남교회사연구소가 소장해오던 것이다.
전시되고 있는 십자고상은 그 가족들이 묘소를 조남천에서 전주 치명자산으로 이장할 때 발굴돼 호남교회사연구소가 소장해오던 것이다.
▲ 이희영의 견도 서소문밖 형장에서 참수된 이희영(1756~1801)은 천주교의 성화와 상본을 그린 대표적 화가로 종교화를 통해 조선 신자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었다. 그의 성화는 전해지는 것이 없고 남아 있는 견도를 통해 서양화 기법을 본격적으로 적용한 그의 체취만을 더듬을 수 있을 뿐이다.
▲ 1811년 서한 신유박해 후 10년이 지난 1811년 북경의 주교와 연락을 다시 취하게 된 조선 신자들에게는 무엇보다 선교사가 간절했다. 조선 신자들은 교황에게 보낸 이 서한에서 조선교회의 상황을 보고하고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