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교구청 근무는 몸이 안좋았던 내게 휴양하라는 교구장의 배려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55년 6월부터 57년 4월까지 2년 남짓 교구청에서 생활하며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진 후 57년 5월 1일 계산동 성당 주임으로 부임했다.
57년 5월 계산동 부임
나에게 「호랑이 신부」라는 꼬리표가 붙게 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아마도 고해소에서 야단맞은 신자들이 붙여준 것이라 생각한다. 성사보는 신자들의 태도에 대한 나무람이 조금은 과격한 방식이었던 것 같다. 꾸지람을 듣는 신자들은 주로 자기 잘못을 고해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잘못을 일러바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누가 나에게 이런저런 잘못을 했는데 내가 지금 꾹 참고 있다』라든지, 『내 잘못은 요만큼 밖에 안되고 타인의 잘못은 엄청 크다』라는 식이었다. 기본적으로 고해성사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신자들에 대한 나무람이었는데…. 그러나 고해소 안에서 큰소리로 꾸짖는 행위는 사제로서 바람직 스럽지 못한 행동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신자들의 잘못은 결국 그들을 지도하는 사제의 잘못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행동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누가 뭐라해도 변명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열심히 성사를 보는 신자들은 오히려 날 좋아했다.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대다수 열심한 신자들에게 지금도 죄송한 마음 금할 수 없음을 전한다.
성당 확장을 위해 성당 주변의 가정집을 사들이던중 화재가 발생했다. 한 청년이 성탄 연극 준비를 하다가 빈 가정집 한채에 불을 낸 것이다. 그러나 열심한 청년의 모습에 꾸지람을 할 수가 없었다. 꾸지람을 한다고 불이난 집이 원상태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또 고의로 불을 낸 것도 아니고, 오로지 성탄연극을 잘 준비해보겠다는 생각으로 노력하다 실수로 불을 낸 것을 어떻게 꾸지람 할 수 있었겠는가? 개선이 가능하다면 꾸지람을 하겠지만 이같이 꾸지람을 해도 별다른 소득이 없을 때는 하지않는 것 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성사생활을 잘 못하는 신자들에게는 따끔한 꾸지람이 필요할 것 같다.
성당 확장 중에 생긴 또 하나의 잊지못할 사건이 있다. 당시 계산성당 동쪽 귀퉁이에 철물공장이 있었는데, 이 부지를 매입하기위해 무척이나 노력했으나 주인은 전혀 팔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 공장에 불이난 것이다. 하루는 아무리 설득해도 요지부동이었던 땅주인이 나를 찾아와 땅을 팔겠다며 그간 고집부린 것에 대해 사과의 말도 전했다. 당시 주인 마음이 변화된 것에 대해 하염없는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다.
최재선 신부님(주교, 초대부산교구장) 재임시에 사들인 부지에 내가 매입한 부지를 합치니 상당한 규모가 되어 순차적으로 유치원과 계산문화관, 매일빌딩 등이 들어서게 되었다. 해마다 수없이 많은 회합을 가져야 하는 본당으로서는 그때까지 사용해 오던 대강당만으로는 각종 회합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대강당을 철거하고 문화관 건립을 서두르게 된 것이다. 나는 평의회와 구역회장 등 신자조직을 개편하여 건립자금 확보에 나섰으나 재정적 어려움으로 나의 후임인 김영환 신부(몬시뇰, 전대구가톨릭대 총장)때 완공됐다. 이러한 계산문화관 건립은 계산본당 재도약의 기틀이 됐다.
범물동 묘지터도 매입
「억대(億臺) 신부」라는 말을 들어가면서도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부지를 마련, 각종 시설들을 들어서게 해 성당을 중심으로한 인근 성역화 사업을 효율적으로 추진했다는 사실에 사목자로서 큰 자긍심을 느낀다.
사실 범물동 묘지터도 내가 매입했다. 감천리에 있던 묘터가 곧 포화상태가 될 것으로 여겨져 당시 본당회장이던 김원석 씨의 도움을 받아 매입했다. 김회장은 양철지붕만드는 공장을 운영했는데 별명이「깡통회장」이었다. 이분은 본당의 대소사(大小事)에 항상 앞장서 많은 신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당시 신자들 대부분은 참 성실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중에는 조금은 별난 신자가 있기도 했다. 한번은 관면혼배를 청하는 사람이 있어 검토를 해보니 혼인장애가 심각했다. 도저히 내 판단으로는 관면을 해 줄 수 없어 「안된다」고 말하니 이 신자가 주교님을 찾아가보자고 했다. 속으론 괘씸했지만 「그래 원하는대로 해주겠다」는 생각으로 함께 서정길 대주교님을 만났다. 주교님은 말씀을 들으시고 난 후 나에게 『박신부님 생각은?』하고 물으셨다. 내가 『절대 안됩니다』라고 답을 하니 주교님께서는 그 신자에게 『보시오. 신부님 말이 내 말이요. 이제 충분히 알아들었으리라 여기오』하고 결론을 내버렸다. 서정길 대주교님의 현명함과 사려깊으심에 깊은 감사와 흠모를 보낸다.
계산본당 주임시절엔 효성국민학교 교장도 겸임했다. 그러나 성실한 교감이 있어 난 거의 간섭을 하지 않았다. 청소년 교육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었지만 섣부른 간섭이 오히려 교사들이 소신을 갖고 일하는데 나쁜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는 생각에 대부분 결정을 교감지휘하에 자율적으로 내릴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니까 훨씬 더 잘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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