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謙遜)이라는 한자어를 보면 음미할 만한 사실 한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두 글자는 모두 제 몸을 낮추다. 그리고 양보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로써 자기를 낮추어 남에게 양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 복음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처세술인 겸손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전반부는 잔치에서 자리다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현명한 처세술은 낮은 자리에 앉는 겸손한 자세임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처세술인 겸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잔치에서 자리를 정하는 사람은 초대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잔치를 주관한 자, 즉 초청자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한다면 손님은 자기 자리를 정할 권리가 없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잔치를 주관하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 말씀의 대상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인데, 이들은 하느님을 마치 자동판매기와 같은 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자동 판매기는 100원을 넣으면 100원짜리 음료를 내어 주고 200원을 넣으면 200원에 상응하는 그 무엇을 주는 것이다.
자동 판매기와 같은 하느님은 결국 우리의 행위에 대해 그 행위만큼 보상과 처벌을 하는 분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있고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 거기에 따르는 결과를 하느님께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여기에는 하느님의 호의가 개입할 자리가 없어지고, 구원의 문제나 하늘나라에서 인간이 어떤 자리를 차지하느냐 하는 문제에서도 하느님은 객관적인 심판자로서 머무르게 된다.
이러한 자기 중심적인 태도는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신앙인들의 또 하나의 자화상이다. 과학시대의 모토는 같은 원인에서는 반드시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하나의 진리이지만 이 같은 진리가 모든 분야에 다 적용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특별히 영성적인 분야나 인간관계의 문제는 이같은 진리를 적용할 수 없는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각을 가지고 접근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구원도 결국은 우리 삶의 전적으로 달려 있는 무엇으로 보게 된다. 때문에 하느님은 더 이상 우리 삶에서 자리를 차지할 하등의 이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분의 활동 공간을 제거하는 것이 마치 과학적이고 현명한 행동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바로 오늘 복음은 이러한 자기중심적이고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공간을 제거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인 것이다.
잔치에서 낮은 자리를 차지하라는 말씀은 결국 잔치에서 자리를 정하는 권리를 가진 초대자, 하느님의 권리를 인정하고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여유를 주기 위해 자신의 허세를 포기하라는 것이다. 바로 이 자세 「하느님의 권리 수용」이것이 겸손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서에서는 겸손을 단순히 자기를 낮추는 자세가 아니라 전능하시고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자각한 사람이 갖는 태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겸손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용서받아야 하고 하느님의 호의를 받아야 하는 부족한 나를 아는 것이고, 이러할 때 자기 비하나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하느님의 자리를 인정할 수 있는 참된 겸손의 자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의 후반부는 우리가 친교를 위해 식사에 초대해야할 사람들은 되갚을 능력이 없는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의 사랑과 대인 관계는 이해득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과 우리의 행위에 대한 보상을 하느님께 맡겨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실망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 원인의 하나가 나의 행위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인간에게 찾는데 있다. 나는 남편과 자녀를 위해 이러 저러한 일을 했는데 남편과 자녀는 아무런 보답을 하지 않기 때문에 서운한 감정이 들고 실망도 한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열심히 노력하고 기도하고 일하는 데도 본당신부나 수녀와 신자들은 도무지 알아주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악으로 돌려주기에 실망한다. 쉬는교우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보면 냉담의 가장 큰 원인이 교회 구성원과의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오는데 이것도 따지고 보면 이해 득실을 따지는 마음과 보상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지 못하는데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을 통해 말하는 겸손의 자세와 더불어 선행의 결과를 하느님께 맡겨 놓아야 한다는 이 말씀은 현대를 사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가장 절실한 삶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생각해 보게 된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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