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 0.1초를 앞다투는 박빙의 승부가 끝난 뒤 엇갈리는 관중들의 환호와 탄식. 주말이면 30만 경마팬들이 몰려드는 과천 경마장의 진풍경이다. 경주마들의 한판승부. 이 안에는 경마를 즐기는 사람들의 희비가 있고 명마들의 치열한 경쟁이 있으며 화려한 조명을 받는 기수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경마장 레이스 뒤에서 365일 말과 함께 호흡하는 또 다른 사람들, 바로 경주마의 간발의 승부를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말을 훈련시키고 관리하는 마필관리사들이 있다.
서울 경마공원에서 마필관리사로 일하고 있는 박희철(가브리엘·41·수원교구 호평본당), 세철(예로니모·37), 인철(프란치스코·34)씨. 450명 마필관리사 가운데 이들은 같은 피를 나눈 형제들이다. 이들이 함께 근무한 지도 벌써 9년째. 86년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 쓰고 장남 희철씨가 제일 먼저 마사회에 입사했고, 대학 복학 전 아르바이트 삼아 시작했던 막내 인철씨는 90년부터 지금껏 일하고 있다. 그리고 제주 경마공원에서 일하던 세철씨가 93년 합류하면서 3형제가 나란히 말과 함께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4남 1녀 중 수녀원간 누나와 은행에 다니는 둘째만 빼고 모두 같은 직장에서 한솥밥을 먹고 있는 것이다. 맏형인 희철씨는 부상도 많고 사고가 잦은 일이라 동생들이 마필관리사가 되는 것을 극구 만류했지만, 모두 '말귀신(말을 지나치게 좋아해서 일컫는 말)'이 씌어 이렇게 말과 함께 살아간다고 한다. 마필관리사는 500kg이 넘는 말에게 밟히고 차이고 넘어지는 일이 빈번하다보니 산업재해 1위를 기록할 만큼 위험부담이 따르는 일이다. 동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맘없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삼형제는 입을 모은다.
말 많이 나는 제주가 고향이고 수의사였던 아버지 덕분에 자연스레 동물을 좋아하게 됐다는 이들. 9조 마방에서 인철씨가 일하고 있고, 34조에서 희철씨와 세철씨가 함께 말을 키우고 있다.
이들이 하는 일은 말 그대로 말을 관리하는 일이다. 새벽 4시30분, 준비운동시키고 안장하고 아침조교를 하면서 관리사들의 하루는 시작된다. 아침운동이 끝나면 마사지, 호흡정리 등 종말(마무리)운동을 시키고, 오후에는 다시 몸풀이 운동과 장제, 기승운동, 수영, 치료 등을 시킨다.
매일 반복되는 단순한 하루일과, 목숨을 건 말과의 씨름, 늘 경기장 뒤에 숨어있는 이들의 노고는 사람보다 말(言)못하는 말(馬)들이 더 잘 헤아려준다. 말이 아플 때나 경기에 나가서 이기거나 지고 들어올 때 가장 기뻐하고 속상해하는 이들이 바로 관리사들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마필관리사들 또한 말에 쏟는 정성이면 자식을 대통령으로 만들었을 거라며 애마(愛馬)정신을 자랑한다.
마필관리사에도 등급이 있다. 보통 한 마방에는 조교사 1명, 조교보 1명, 평관리사 8∼9명이 한 조를 이룬다. 일정교육을 받으면 누구나 관리사 자격이 주어지지만 조교사가 되려면 관리사 경력 12년 이상이 돼야 응시자격이 주어진다. 세철씨와 인철씨는 아직 평관리사지만 희철씨는 경력 15년차 조교보다. 조교사가 없을 때 업무를 대행하는 희철씨는 말 다루는 솜씨가 경마장 내에서도 소문이 나 있을 정도다.
주말에 일하고 평일날 쉬는 이들의 우애는 어릴적부터 남달랐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원 아파트에 옹기종기 모여살며 놀러갈 때도, 성당갈 때도, 일할 때도 늘 함께 하다보니 좋을 수밖에 없다며 돈독한 형제애를 과시한다.
경마산업의 눈부신 발전만큼 레저문화로서의 정착, 마필관리사들에 대한 배려 등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삼형제는 거짓 없는 말과 평생을 함께 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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