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본당 주임시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가 개막됐다. 나는 서대주교님, 전석재 신부님과 함께 공의회 개막식에 참가하는 영예를 안았다. 사실 나는 자격이 없었으나 당시 총대리 이명우 신부님이 못가시는 바람에 역사적인 행사에 참가할 수 있게 되어 사목자로서 큰 경험을 했다. 개막식 참석 후 바로 귀국하지 않고 당시 청주교구장 피 디 야고보 주교님, 제찬규 신부 등과 함께 이스라엘을 순례했다. 순례중 다볼산에서 맛본 포도주 맛이 아주 좋았다. 그렇게 점잔을 빼던 사람들도 너도나도 한잔 더 달라고 아우성(?)을 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귀국해서 이스라엘 순례에 대한 견문록을 작성, 가톨릭시보(현 가톨릭신문)에 30회에 걸쳐 연재해 호평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엔 이스라엘을 순례해 본 사람이 드물어서 아마 많은 신자들에게 신선함과 생동감을 불러 일으킨 것 같다. 서울에 계시던 최민순 신부님은 글이 좋다며 유럽교회 기행문도 게재하면 좋겠다고 은근히 권유하기도 했다.
「폭주가」…술매너는 깨끗
술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지금은 거의 술을 마시지 않지만 한땐 대단한 「폭주가」였다. 그러나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절대 취해서 주정을 부리는 경우가 없었다. 공산당원에 의해 대구법원이 불탄적이 있었는데 그날밤 공산당을 성토하며 서대주교님과 술을 진탕 마셨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지만 다음날 새벽 미사를 집전하러 나가는 모습을 보고 서대주교님이 『박신부는 술마실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술마시는 부류로 따지자면 나는 「두주불사형」. 술 종류나 양에 제한이 없었지만 술 매너는 항상 깨끗했다. 술도 많이 마셨지만 담배도 많이 피웠다.
젊었을 때 이렇게 술과 담배를 많이 해도 건강을 잃지 않은 것은 모두 주님의 은총 덕분이다. 주님께서는 사목자로서의 빈틈없는 자세를 갖추도록 도와 주셨고 이와 더불어 나 자신이 절제된 생활을 하려고 노력한 결과라 생각한다.
계산동 주임 시절에 기억에 남는 또 한가지 일은 1960년에 일어난 2·28 대구학생의거와 4·19 학생의거를 추모하기위해 마련한 하기 묵상회다. 60년 8월 1~2일 이틀동안 학생회 주최로 개최된 이 행사에서 신자 학생들은 가톨릭학생운동이 본당의 전통에 부합한 건전한 사회참여 운동으로 승화되어야 한다는 것에 뜻을 모으기도 했다. 계산동 학생회가 주관한 이 묵상회를 필두로 연이어 대한 가톨릭학생 총연합회에서는 8월 4~8일 효성여자대학교(현 대구 가톨릭대)에서 '현 한국사회와 대학교육에 따르는 가톨릭학생운동의 진로'를 주제로 서울 대구 부산 등 8개교구에서 참가한 신자학생들이 가톨릭학생운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펼친 것이 기억에 남는다.
평의회 등 신자조직 개편
신자재교육을 강화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사상강좌와 교리강좌를 개설하기도 했으며 사목 효율을 높이기위해 평의회와 구역회장 등 신자조직을 개편했다. 특히 당시 정순재 보좌신부님이 신학교 재학시절에 익힌 수화를 바탕으로 「수화교리 강좌」를 개설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정신부님의 정성에 탄복했다. 어려운 이들의 마음을 알고 그들의 고통을 나누려 했던 정신부님의 따뜻한 사랑이 느껴지는 순간들이었다.
이렇게 본당 사목을 해 나가던 중 69년 6월 3일 사제수품 25주년 은경축을 맞이했다. 이 행사에는 서정길 대주교님과 장병화 주교님 등 많은 분들이 오셔서 축하해 주었다.
57년 5월부터 71년 10월까지 햇수로 15년 가까이 사목했던 계산본당을 떠나 71년 11월 1일자로 금호본당에 부임했다. 오랜 세월 사목했던 계산본당을 떠난다는 섭섭함과 이젠 시골본당인 금호본당에서 조금은 여유있게 사목을 할 수 있겠다는 마음들이 교차했다.
금호본당에서는 가까이 있는 하양이나 영천본당 신부님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틈이 날 때마다 금호강가를 산책하고 등산도 하며, 또 본당 근처에 있는 연못에서 낚시도 즐겼다. 한때 금호본당이 소속돼 있던 지구를 「준동(蠢動)지구」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만큼 일을 만들어 여러 신부님들과 어울려 지냈다. 노후에 소일(消日)거리로 장기를 생각하고 두다보니 어느새 '고수'라는 명칭이 붙을 정도로 잘두었다. 그런데 막상 현직에서 은퇴해 장기를 두어보니 조금만 생각해도 골치가 아파 금방 피곤함을 느끼곤 한다. 나에겐 장기가 노후 소일거리가 아닌 모양이다.
농협사택 구입
금호본당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성당 이전에 한몫했다는 사실이다. 허름한 시골본당이던 금호성당의 재건립 필요성을 느껴 성당 옆에 있던 농협 사택을 구입해 이를 활용하도록 했다. 나중에 금호본당이 이것을 팔아 성당 이전 경비로 사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당시 사정으로 조그마한 시골본당의 이전은 무척이나 힘든 상황이었으나 내가 구입해 놓은 사택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여겨진다. 금호본당에서의 즐거운 추억들을 뒤로하고 다음 발령지인 날뫼 본당(현 비산본당)으로 향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