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산」(飛山)의 옛이름은 「날뫼」로서 「비산」은 날뫼의 한문 표기이다. 날뫼 마을은 대구지역에서 가장 먼저 천주교 신자들이 살고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이 유서깊은 지역의 새복음화를 위해 우선 본당 신자들의 화목과 일치에 사목의 중점을 두었다. 특히 신자들의 신심을 굳건히 하고 기존 단체들의 유대를 강화시키는 동시에 활동적이며 의욕적인 봉사를 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 10개의 쁘레시디움이 설립되기도 했다. 또한 신자들의 경제적인 자립을 돕고자 신용협동조합 활성화에 애를 썼다. 이러한 노력덕분인지 신협은 1983년 3월에 재무부 인가를 획득하기도 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장기적인 본당 재정의 확충을 위해 성당 근처에 있던 네모반듯한 땅 600평을 매입했던 일이다. 건물을 짓지는 못했지만 이 땅이 유용하게 쓰였으리라 생각한다.
비산본당에 이어 내가 부임한 곳은 남산본당. 남산본당 주임시절, 한국교회엔 의미깊은 일들이 참 많았다. 「1983년 특별 성년 개막」이나 「200주년 기념대회 및 한국순교복자 103위 시성」「제8대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 착좌」「이윤일 성인의 유해 봉안」「서정길 대주교 서거」등 교회사에 한 획을 그을만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특히 서대주교님의 서거에 가슴 아파했다. 서대주교님은 근 32년간 한국교회의 발전과 안정의 기틀을 다진 주역으로 일제 통치와 6·25 등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민족의 아픔을 함께 하며 한국교회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분이셨다.
남산본당에서는 1983년 1월 25일부터 1987년 6월 1일까지 약4년5개월간 사목했다. 언급한 것처럼 교회사적으로 큰 일들이 많이 발생했지만 본당차원에선 숙원사업이던 성당내부 수리 및 개조공사를 무사히 마친 것이 큰 기쁨으로 기억된다. 성당 내부를 방음이 되게 했고 성가대 좌석을 일반 신자들까지 앉을 수 있도록 확장 개조했다.
이땐 무척이나 신자들에게 확고한 신심과 근검절약 정신을 강조했다. 근검절약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기본이라 생각한다. 또 성무집행을 매우 엄격하게 시행했고, 무더위에도 에어컨을 사용하지 않는 등 재정을 절약해 성당 수리비에 보탰으며 본당 사무원이나 식관 직원들에 대한 위로금이나 양로원, 고아원 등에 보내는 희사금은 가능하면 사비(私費)로 지출했다.
이렇게 본당에서의 마지막 사목을 하던 중 87년 6월 2일 성가양로원과 한국순교여자사도회 지도신부로 임명됐다.
한국순교여자사도회는서정길 대주교님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가하신 후 「평복 수도회」의 필요성을 느껴 만든 단체로 1975년에 회헌이 만들어지고 임원이 구성됐다. 이 사도회 회원들은 성가양로원과 성가요양원 등지에서 자신들의 영성인 「사회복지사업」을 실천하고 있다.
올해로 사제생활 57년째. 공기좋고 물맑은 조용한 곳에서 기도하며 보내는 요즘 참으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제로서의 지나온 삶과 남은 삶을 생각하며 앞으로도 대과(大過)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간구한다. 「천생연분」(天生緣分). 이 말처럼 내가 사제가 된 것은 바로 하느님과 나와의 연분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마 그래서 못난 자식이지만 사랑을 듬뿍 주신 것 같아 한없는 감사를 드린다.
옛말에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는 말이 있다. 「감히 청하지는 못하였으나 본디 바라던 바였다」는 뜻을 지닌 이말이 지금의 내 심정이다. 「다시태어나도 이 길을」가고 싶다. 하지만 하느님 생각은 어떨지…. 과연 하느님이 허락해 주실지….
이 글을 끝내며 후배사제들에게 『나처럼 되지 말라, 나를 닮지 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후배사제들이 나보다 훌륭해야 교회의 미래가 보장된다. 나보다 못하면 교회는 후퇴할 것이고 나만큼되면 발전이 없다. 「빈틈없는 사목자의 자세」를 갖추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다. 열심한 사목자가 되기 위해선 자신의 노력과 더불어 항상 하느님의 은총을 간구해야 한다.
신자들에게는 『더욱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길』당부한다. 대다수의 신자들은 참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이제는 기초적인 것과 더불어 한단계 높은 차원의 신앙성숙을 위해 노력해야 할 시점이다.
나의 글이 이번으로 끝나고 다음호부턴 서울에 계시는 임충신 신부님 글이 연재된다고 하니 참으로 반가운 마음이 든다. 임신부님은 내가 소신학교 시절 라틴어 스승이었다. 어학(語學)을 잘 못해 신부님의 속을 많이 썩혀 들었던 기억이 난다. 건강하신지 궁금하다.
희미한 기억 속에서 나름대로 옛날 일들을 떠올리며 정리해봤으나 부족한 점들이 너무 많았던 것 같다. 재미없는 글이었지만 끝까지 읽어준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 글을 맺는다.
지금까지 수고해 주신 박상태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호부터는 서울대교구 임충신 신부님의 삶과 신앙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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