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에게 주어지는 무한한 은총의 신비를 깨닫기 위해서는 ‘성찰’(省察)을 해야 한다. 하지만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성찰’이라는 단어를 부담스러워한다.
여기서 우리는 성찰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 대부분은 성찰이라고 하면 내성(內省·Introspection)과 내관(內觀)을 떠올린다. 즉 ‘자기 반성’(Self-exam ination)이다.
성체 앞에 앉아서 성찰을 하면 열에 여덟 아홉은 스스로의 잘못된 점에 대해 반성만 한다. 하느님께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 반성하고, 동료, 이웃에게 잘못한 행동에 대해 반성하고, 스스로의 인격적 결함에 대해 반성한다. 그리고 끝없이 걱정한다.
오히려 우리는 성찰을 할 때 ‘초월’(超越)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떤 상황속에서도 초월할 수 있다. 하느님께선 내가 초월할 수 있도록 섭리하실 것이다. 이럴 경우 걱정이 사라진다. 걱정되는 일 자체가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걱정되는 일보다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섭리를 통해 우리의 정신을 초월로 초대하신다는 사실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갑자기 잃었다고 가정해보자. 부모님, 아내,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고 가정해 보자. 이럴 경우 우리는 살아있을 때 더 효도하지 못하고, 더 사랑하지 못하고, 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을 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가슴을 치고 안타까워한다. 자주 방문하지 못했고, 자주 편지 쓰지 못했고, 자주 전화하지 못한 것에 대해 심한 죄책감을 느낄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내성(內省·Introspection)적 차원의 성찰이다. 이런 성찰을 계속하다 보면 ‘나는 역시 나쁜 사람이야’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종교는 멀쩡한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은총을 이야기하기 위한 조건으로 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죄에 대해서 강조를 많이 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인간에 대한 규정을 새로 세웠다. 이제는 은총이 중요하다. 죄는 어쩌면 아주 작은 문제일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좀 다른 방법으로 성찰해 보자.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아내가 선종했다. 사랑하는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이럴 경우 대부분은 ‘조금만 더 잘해드릴 걸’ ‘나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을까’ ‘평소에 좀 더 따뜻하게 대할 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심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바로 나타나는 강박적 감정이다. 이런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문제는 이런 강박적 감정에 스스로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슬픔과 죄책, 부끄러움, 실패, 회한을 있는 그대로 망자(亡者) 앞에서 나 자신을 완전히 내어 맡겨드려야 한다. ‘그래. 나 슬퍼’ ‘그래. 나 괴로워’ ‘그래. 나 어머니께 죄송해’라고 해야 한다. 슬프고, 미안하고, 죄스러운 감정이 나타나면 그 감정들을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
여기서 신앙은 출발하는 것이다. 신앙인은 인간적 사고방식으로만 살아서는 안 된다. 신앙을 살아간다는 것은 일반 사람(신앙이 없는 사람)과는 다르게 생활하는 것이다.
한 고등학생이 형편없는 성적표를 받았다고 가정해 보자. 이 학생이 나쁜 성적을 비관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다닌다면 어떻게 될까. 부모님께 성적표를 보여드리고 솔직히 자신의 잘못을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잘못에 매몰돼 고민하고 방황할 것이 아니라, 솔직히 하느님 대전에 모든 것을 내놓고 무릎 꿇어야 한다.
현재 느끼는 나의 감정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 그 분께 맡겨드려야 한다. 그리고 그 분의 뜻을 생각해야 한다. 그 분께 내어 맡겼기 때문에 이제는 기도를 시작할 수가 있게 된다. 초월적 자아 현존(transcendental self presence)을 느낄 단계에 왔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내 안에 함께 현존하고 계심을 느끼는 것이다. 이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면서 그분께서 원하는 기도를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기도는 지금까지 해온 인간적 기도가 아니다. 바로 영감(Inspiration)의 기도다.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 맡기면 그때부터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감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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